뉴플리머스(New Plymouth)에 다녀왔습니다. 뉴질랜드 북섬 서해안에 위치한 정원의 도시 뉴플리머스는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엔 정원 축제(Garden festival)의 시기는 놓쳤지만 수국(水菊)을 좋아하는 아내가 철쭉(Rhododendron) 철은 놓쳤지만 수국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기에 가까이 지내는 선배 부부와 같이 차를 몰고 내려갔습니다.
뉴플리머스에 도착하기 한 시간쯤 전에 세 자매 바위(Three Sisters Rock) 해변이 있습니다. 몇 번이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세 자매 바위를 보고 싶었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 멀리서 서성거리다 돌아서곤 했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물때가 맞기에 차를 세우고 해변을 걸어 들어갔습니다. 물이 나간 세 자매 해변은 걷기에도 좋았고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맞닿은 하늘과 더불어 바다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빚어냈습니다.
세 자매 바위
해변의 가깝고 먼 풍경에 감탄하며 한참을 걷다 왼쪽 모퉁이를 돌자 세 자매 바위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 부부를 맞아주었습니다. 자연의 신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오랜 세월 오직 물과 바람의 힘으로 해변에 세 자매의 형상을 닮은 바위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어림잡아도 20미터는 더 될 큰 키의 세 자매였습니다.
먼먼 옛날에 이 세 자매는 어쩌면 하나의 큰 바윗덩어리였을 것입니다. 그 바위가 셋으로 나뉘어져 오늘의 모습이 될 때까지 끈질긴 인내심으로 바위에 다가와 온몸으로 부딪혀 작품을 만들어 냈을 바다야말로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돌덩어리는 그 안에 상(像)이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조각가의 임무이다’라고 말한 미켈란젤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바다는 까마득한 옛날에 큰 바윗덩어리에 숨겨진 세 자매의 상을 발견하였기에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연의 창조물을 보며 한참이나 감탄하다가 우리 부부는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코끼리 바위
세 자매 바위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다 왼쪽 맞은편 해안가에 있는 기이하게 생긴 바다 동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 자매 바위를 보려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바닷가 암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코끼리의 모습을 닮기도 한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바위를 잘 보세요. 곡선형으로 아치를 그리며 내려온 바위가 꼭 코끼리 코처럼 생겼지요. 그래서 이 바위를 코끼리 바위라고 부르나 봐요.”하고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던 선배가 말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하고 나는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깨달음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세 자매 바위’라는 목표를 정하고 앞으로만 갔기에 어쩌면 더 귀할 수도 있는 풍경을 놓쳤던 것입니다. 여행에서도, 그리고 가장 긴 여행인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세상이 정해 놓은, 혹은 나 스스로 정한 어떤 목표만을 향하여 너무 급히 나가다가 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바로 내가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바다의 미풍(微風)
“그만 나가지요. 뉴플리머스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 가야 해요.”하고 돌아서는 선배 부부를 따라 우리 부부도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다시 해변을 걷기 시작한 우리 일행 위로 한 차례의 부드러운 바람이 쓰다듬듯 보듬고 지나갔습니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잔잔한 바다 위 물결을 따라 살랑거리며 다가온 바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떼판느 말라르메(Staphane Mallarme: 프랑스의 시인)의 시(詩) ‘바다의 미풍(微風)’의 첫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바다와 바람이 어우러져 머릿속 어딘가에 가만히 엎드려 잠들어 있던 기억을 일깨웠나 봅니다.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떠나자! 저곳으로 떠나자.’
결코 말라르메가 모든 책을 다 읽었기에 이렇게 외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읽어도 읽어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이었기에 육체는 슬프다고 부르짖으며 저곳 미지의 피안으로 떠나자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도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나는 아직도 시간의 대부분을 책에 파묻혀 보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근래에는 책을 보아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또 읽은 내용을 잘 기억도 못 합니다. 그러면서도 습관에 젖어 책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래 나도 이제는 책을 놓아주어야겠다. 그리고 책 너머에 있는 보다 넓고 큰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라고 나는 혼자 속삭였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도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지식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지식욕이라는 목표 때문에 오늘 ‘세 자매 바위’만 찾으며 ‘코끼리 바위’를 놓쳤던 것 같이 나는 내 삶에서 다른 많은 것을 놓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모든 가진 것을 내려놓아 심신을 가볍게 해야 할 땐데도 책만은 쉽게 놓지 못한 것은 그 또한 미련이고 욕심이었습니다.
육체를 만족시키는 쾌락을 추구하는 정욕도 문제이지만 정신을 만족시키는 희열을 추구하는 지식욕도 문제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모자라는데 억지로 책을 붙들려고 했던 내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금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나누며 두루두루 많은 것을 살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때 바다로부터 다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쳤습니다.
“바닷바람이 참 상쾌하네.”라고 말하며 나는 옆에 있는 아내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해변을 걸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