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누미노제’ (Numinose)에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로

루터(Martin Luther)의 ‘95개조 논제’ 부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입니다. 돈에 대한 교회의 무절제와 면죄부 판매 행위를 격렬히 비난하는 공개 반박문이었습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 사제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며 대학 교회의 설교자로, 대학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공식적으로 요청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내걸었던 95개의 논제는 강의에 앞서 공개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제안한 것으로, 직접 토론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서신으로 참여해 주기까지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2주 안에 독일 전체로 퍼져 나갔고,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기폭제가 되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됩니다. 루터는 95개 논제의 시작을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말씀하신 것에 따라 진정한 회개의 회복을 중심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이 말씀이 고해성사(sacramental penance), 즉 사제에 의해 집도 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하지만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inner repentance)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이처럼 루터가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회개”(repentance)로 로마 교회의 “고해성사”가 성례 제도로 정착돼 사제들에 의해 죄의 자복과 사면을 하는 것이 왜곡되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는 ‘이신칭의’ 회복을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참된 회개의 토대 위에서만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가 세워진다는 것을 중심 주제로 출발점을 삼았습니다. 그러한 까닭은 중세 교회의 기반인 스콜라주의에서는 “회개”(penance)란 종교적 입장과 더불어 세속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회개를 빈번하게 반(半)-펠라기안 주의처럼 ‘돕는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직 하나님에 의한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 교회가 제시하는 회개의 주관적 조건들은 ‘바른 의지,’ ‘은혜에 대한 신뢰,’ ‘겸손’이었고, 객관적 조건들은 ‘진리에 대한 믿음,’ ‘도덕적 규범 준수,’ ‘성례의 수용과 교회 권위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회개한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의 사역보다 강조되었고, 성경에서 말하는 요소들보다 사법적이고 교회적 측면이 훨씬 더 강조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종교 개혁자들이 외치는 “repentance”는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뉘우쳐서 더 이상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결심하는 것을 의미하며, 중세교회의 “penance”는 회개의 마음을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종의 선행, 기도, 자선 행위 등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회개(repentance)를 내적인 변화와 삶의 전체적인 전향을 의미하는 ‘μετάνοια’의 신약성경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메타노이아는 헬라의 군사들이 한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뒤를 돌아야 할 때, 상관이 ‘μετάνοια!’ (After head! About face! 뒤로 돌아 앞으로 가!)라고 외치면 그 순간 즉시 이동하던 병력이나 부대가 즉시 멈추고 뒤로 돌아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는 명령어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요청하시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였습니다(사 55:7; 렘 3:12, 22, 4:1; 요엘 2:12; 슥 1:3, 4; 말 3:7).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와 중심적인 메시지 역시 회개였고(마 3:8, 4:17; 막 6:12; 눅 17:3), 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눅 5:32).


누가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눅 3:3; 행 13:24)라고 불렀고,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선포해야 하는 케리그마의 핵심이 “회개”라고 강조합니다(눅 24:47; 행 2:38). 바울 사도에게 회개라는 것은 죄에 대한 끊어버림이요(고후 2:21),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의 결과이었습니다(고후 7:10). 초대교회에는 회개는 물세례로 고백하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는 회개에 대한 신앙고백과 가르침이 존재하였습니다(히 6:1).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 회개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제이며 개혁의 동인(動因)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회개는 ‘돌아섬’ 또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중세의 회개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회개의 개념을 재정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메타노이아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두려움에서 생겨나며, 옛사람의 죽음과 영의 삶으로 구성된 하나님께로의 참된 삶의 전환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로 마음과 생각과 뜻과 행동을 돌이키는 것으로, 이는 종교적 윤리적 실천적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포함합니다. 결국 회개는 곧 전적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회개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라고 보았습니다. 회개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므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에게 있어 회개는 결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과 은혜의 결과로 소망과 구원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고, 죄의 용서는 안전의 원인이 됩니다.


때문에 칼빈은 회개를 그분의 손에 의해 “이끄심”(leading)의 개념으로 보았고, “초대하다”(invite)라는 말보다는 “이끄신다”(leads)는 말을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비록 칼빈에게 있어 회개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죄인의 자발적인 삶의 변화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성화라는 말보다 회개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종교적 경험의‘신비적 형태’(mystical forms)에서‘일상적 형태’(ordinary form)로
신학에서 경험은 애매한 용어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경험은 “직접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얻은 축적된 지식”을 뜻합니다. ‘경험 많은 기술자’라든가 ‘경험 많은 의사’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그들이 실제적인 삶을 체험함으로 지식을 배웠다는 의미입니다.

종교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초기 감리교회의 특징입니다. ‘존 웨슬리의 4대 원리’라는 용어는 보통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묶어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경건주의 특징으로 웨슬리가 가장 강조한 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생생한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교적 경험은 저절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이란 때로는 종교적 경험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경험 위로 던지는 그물과 같은 것입니다. 즉 종교적 경험은 기독교 신학이 제공하는 틀을 사용하여 해석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 경험의 형태는 크게 ‘신비적 형태’와 ‘일상적 형태’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인식 전체를 채우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그의 저서《성(聖)스러운 것》에서 라틴어의 누멘(numen: 아직 명확한 표상을 갖추지 않은, 즉 형용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서 비롯된 철학 용어를 빌리면 ‘누미노제’ (Numinose)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피조물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사람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신비’로서, 경외심을 동반한 전율적이고 압도적인 권위, ‘절대타자’로서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시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다만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환상, 마음의 소리, 괴이한 감정,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공적으로는 기적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다른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하기에 바람직한 경우 그것은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이어져야 합니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 생활과 그리스도인으로 가정과 직장에서와 같은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삶의 체험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가 점차 더해져 나타나는 ‘의식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종교철학자 윌리엄 템플은 이것을 “종교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형태”라고 표현합니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흔히 ‘신중심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종교적 경험에 관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가 ‘일상적 형태’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를 경험하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는 의미의 중요성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상응하는 신약성경의 용어가 회개를 의미하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입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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