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가 그의 첫 이야기를 화이위조(化而爲鳥)를 통해 인간이 절대적 자유(自由)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을 말하고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삶의 현실이 무언가에 얽매인 부자유(不自由)한 상황임을 반영한다. 마치 인류가 평화를 가장 절실하게 외치는 시기는 전쟁의 기간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의 현실은 비상(飛上)하는 붕(鵬)이 아니라 겨우 작은 물고기 혹은 물고기조차 될 수 없는 알과 같은 ‘곤’(鯤)의 존재임을 말한다.
하지만 이름만 ‘곤’(鯤)이고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큰 물고기다. 또한, 전설의 붕새가 되어 날아가려면 그만큼 강한 바람이 있어야 하고, 한번 날면 9만 리(36,000Km – 지구 한 바퀴가 약 10만 리인 40,000Km)를 날아오른다. 이러한 부분에서 우리는 장자의 패러독스와 우화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장자의 언어는 우리의 이성적인 사유를 해체하기 위하여 논리의 역설과 극히 과장된 표현을 통해서 초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그를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머무르지만,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서 땅바닥에 동댕이쳐진다. 그런데 어째서 9만 리나 올라가 남쪽으로 가려고 하는가? 터무니없는 공연한 짓이다”<소요유 5>.
매미와 비둘기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현실에 구속되어 ‘한계적 앎’에 얽매어 부자유한 사람들의 상황을 잘 표현한다. 나무와 숲에 붙어사는 매미와 비둘기의 비행 실력은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옮겨 다니는 데 그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작은 숲이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곤(鯤)이 붕(鵬)이 되어 날아오르는 것을 비웃은 이유는 자신들의 세계가 전부라 여기고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숲의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고, 죽음을 면할 정도의 이슬과 벌레를 먹고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면에서 이는 매미와 비둘기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삶의 자세가 된다. 따라서 붕새처럼 높고 멀리 날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옳지 않고, 쓸모없는 일이다.
이처럼 장자는 사람들이 매미와 비둘기처럼 자신의 현실에 사로잡혀, 즉 제한적인 앎이 전부인 성심(誠心)에 매달려 상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으로 자유로운 인식의 초월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부자유함’이라 하였다. 그러하기에 장자는 사람들이 절대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에도, 현실의 삶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코헬렛의 헛됨(하벨)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도서 1:14).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8).
코헬렛은 모든 인간의 삶이 시간과 공간에 제한됨으로 부자유함에 빠져 있음을 ‘헛됨’(하벨)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이 단어는 전도서에서 총 38회가 사용되며, 특히 장자와 같이 부자유한 삶의 현실인 ‘해 아래’에서의 인간의 인식과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총 6회(전도서 1:2, 1:14, 2:11, 2:17, 3:19, 12:8)에 걸쳐 ‘모든 것이 헛되다’라며 고백하였다.
하지만 코헬렛이 헛되다고 선언한 ‘모든 것’은 무엇보다 신의 영역과 구분되는 인간이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일과 그 일의 결과를 가리킨다. 그러하기에 코헬렛의 ‘모든 것’의 범주는 ‘해 아래에서 인간이 행하는 일’(전도서 1:13; 2:17)이라는 구체적인 범위로 제한된다.
무엇보다 ‘해 아래’는 신적인 영역과 구분된, 인간이 살아가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는 해가 존재하는 하늘 아래로,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의 영역과는 분리된 공간이다. 즉, ‘해 아래’는 ‘하늘 아래’(天下, 전도서 1:13; 2:3; 3:1)에 있는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가리킨다.
또한, 시간적인 범위의 ‘해 아래’는 신의 영역인 ‘영원’과는 대조되는 ‘때’와 ‘기한’(전도서 3:1)으로 제한된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행하는 일’(전도서 1:14)이라 함은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이며, 사람의 행위와 함께 그 행위로 인한 결과적 사건들을 포함한다.
하지만 전도서에서 코헬렛이 “모든 것이 헛되다”를 선언하지만 그 범주에는 피조물로서의 우주 자체와 인간 존재 자체는 포함되지 않는다. 비록 인간이 본래의 선함을 스스로 훼손시켰고, 이로 인하여 그 모든 행위가 “바람을 잡는 것”(전도서 1:14, 2:11, 2:17)과 같이 덧없는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훼손될 수 없는 근본적 존엄을 간직한 존재임을 말한다. 이는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 짐승과 다를 바 없지만, 그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종말론적인 심판에 참여하는 존재로 긍정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신성한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증언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후서 1:4).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장자의 ‘무하유지향’에서의 절대 자유는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유와 헛됨의 원인 – 시시비비(是是非非)와 선악의 판단
장자는 화이위조(化而爲鳥)의 이야기로 코헬렛은 창세기의 창조 신학을 기반으로 변화와 초월의 자유의 경지에 이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이해하지만,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한계와 지식과 경험에 대한 인식론적인 한계로 현실의 삶에 대한 평가를 장자는 ‘부자유’(不自由)로, 코헬렛은 ‘헛됨’을 인간 이해의 핵심 단어로 말한다. 그 원인을 코헬렛은 인간이 본래 선한 본성으로 창조되었으나 자신의 욕망으로, 코헬렛의 언어를 빌리면 ‘많은 꾀들’로 그것을 훼손시킨 것이라고 본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도서 7:29).
인간의 정직함이 ‘많은 꾀’로 훼손되었다는 말은 창세기의 금지된 열매, 즉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의 기준이었지만, 인간은 신적 지혜에 대한 욕망으로 그것을 훼손하였다. 인간에게 타고난 선함, 즉 장자가 추구한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 사도 베드로가 증언한 신성한 성품, 즉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훼손되어 부자유하게 되었다는 코헬렛의 외침이 된 것이다.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의미로 한문의 ‘시’(是)는 성경의 ‘선’(善)과 비교할 수 있다. ‘선’(善)은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말로 이 단어가 가장 처음 쓰인 곳은 창세기 1:4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지어지고 나면 그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쓰인 단어가 ‘토브’(선)이다.
코헬렛도 전도서 2장 24절에서 우리말 성경에는 잘 표현이 되어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선’(토브)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왔음을 말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서 시작되었을 보여준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도서 2:24).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선’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목적대로 완성되어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선’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장자가 절대 자유에 도달하려는 방편으로 수행하는 가르침, ‘도’(道)의 추구가 아닌, 혹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착한 행실이나 윤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는 삶’을 의미한다. 즉 완전한 자아의 부인(무기 無己)으로 자기의 주장과 생각이 없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존재하는 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함으로 찬송가 495장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선과 악을 스스로 구별하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들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가 선악의 판별자가 됨으로 선악의 구별이 없는 절대 자유의 자리에서 부자유의 자리로 옮겨진 셈이다. 즉,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을 행한다고 이야기하며, 그때 비로소 참 인간임을 말한다.
내 기준(성심 誠心)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가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하는 것을 악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선과 악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별하시고 결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온전한 자기 부인 혹은, 절대 순종의 상태는 바로 선악을 모르는 상태이다. 장자 내편의 마지막인 응제왕의 혼돈에 관한 우화에서 남해의 숙과 북해의 홀의 판단이 혼돈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우화도 그렇게 해석해 볼 만하다.
장자도 제물론에서 만물은 모든 것이 하나의 ‘도’(道)로 통하며 한결같으니, 모든 일에 자신의 편견에 의한 시시비비를 다투지 말며 대자연의 도리(도추 道樞)에 맞게 살라고 한다. 이것은 도리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닌, 성급하고 극단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으로 오히려 진리를 그르치고, 도리에 어긋날 수 있는 성향에 대해 경계하는 것으로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자기 자신의 판단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침략에 폐허가 되어버린 우크라이나의 도시들을 보며, 코헬렛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탄식은 장자의 절대 자유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는 화두(話頭)인 셈이다.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인류의 비극을 보며, 헨델의 오페라인 리날도(울게 하소서 – 영화 파리넬리의 OST)의 아리아 가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E che sospiri la libertà!/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à!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