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뮤지컬 ‘내 어린 양을 먹이라’를 공연한 이후로 ‘믿음으로’, ‘수군수군’ 등 총 3편의 뮤지컬을 창작 공연해왔다. 그리고 올해 10월, 성경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창작하여 공연할 예정인데, 이번 칼럼에서는 이 인물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고자 한다.
성경에서의 부자 청년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부정적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건데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 재물을 선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다’는 그의 고백은 당돌함을 넘어 교만하게 느껴지며, 마지막으로 영생에 대한 질문이 마치 다른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마 19:3, 마 22:15, 요 8:3).
그렇기에, 탐욕적이고 교만한 이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당연스레 부정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보실 수 있으시고(요 2:25),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몰려와 물은 질문들에 무시 또는 질책하셨던 반응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우리의 예상 밖 다른 반응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모든 계명을 지켰다는 부자 청년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보셨다는 표현이 바로 이어진다. 이 표현이 낯설게 보이는 이유는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부장의 믿음(마 8:10)을 보시고 놀랍게 여기셨다 같은 예수님의 인간적 감정 표현은 성경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마 8:10).
또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한 인물을 향해 직접적으로 ‘사랑하시어’라고 표현한 부분도 부자 청년 이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나사로와 요한을 표현할 때 ‘사랑하시는 자’라고 설명된 구절들이 있다(요 11:3, 요13:23).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직접적 대화에서 나온 표현이라기 보단 제 3자의 관점에서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로 부르고 있다. 또한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와 같이 제자들 다수를 향한 표현도 있지만(요 13:1) 이 역시 부자 청년처럼 개인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신약학자 Craig A. Evans(2001,98)는 그의 마가복음 주석(WBC 34b)에서, 이 ‘사랑하사’ 헬라어 원문 “에가페센 아우톤의 동사에 대해 주목한다. 그는 이 단어가 단순히 내면의 감정이 아닌 능동적 행동을 가리킬 때만 쓰이는 단어임을 설명하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을 애정의 표시로 안아주셨음에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이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서 저자 마가는 ‘에가페센 아우톤’ 단어로 이 상황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을까?
우리가 아는 대로 마가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 21~22절에서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예수님을 떠난다. 신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심지어 예수님은 이 청년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시고 이 청년이 재물을 선택하며 떠날 것을 미리 아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조차 비난하고, 신앙생활에 반면교사로 삼는 이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왜 이렇게 특별한 반응을 보이셨을까?
마가복음 17-21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건대 눈에 띄는 점은 두 가지이다. 17절에 이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앉아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가 집에서부터 달려 나왔는지, 혹은 멀리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달려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달려온 이상 예수님 발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무릎 꿇고 있었을 것이다. 즉, 차분하고 체면을 차리며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다기 보단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릎을 꿇은 그의 절박한 감정 상태를 예상해볼 수 있다.
또한 22절에서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는데 왜 그의 반응이 분노 아닌 슬픔이었는지 의문이다. 그가 가진 재물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는지, 또는 자신이 노력하여 모은 재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 청년을 정의하는 것은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였다. 구약시대 당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변에서 그의 가치는 신앙인의 모범으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인들조차 누군가 나의 소중한 가치, 또는 노력의 결과물을 의미없다 말한다면 분노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기보다 슬퍼하고 근심하며 떠난다. 즉, 예수님을 떠나면서 슬퍼할 정도로 그의 중심에는 내면적 갈등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부자 청년의 절박함을 보았을 때 자신이 부자임에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해결해 주실 예수님을 선택할 수도,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이 재물을 버릴수도 없는 모순적 감정 사이에서 이 갈등과 근심이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교회와 삶에서 반복하는 상황과 비슷하지 않는가?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인생의 고민들을 주님께 털어놓고 해답을 구하지만, 가정과 직장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타협하는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고단한 인생 속 삶의 문제와 갈급함을 해결해주실 예수님을 포기할수도, 그 현실의 삶을 당장 포기할 수도 없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순된 마음이 바로 부자 청년이 가졌던 갈등과 같지 않을까?
떠나는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왜 그 청년을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면 단순히 ‘돈을 사랑하지 마라’의 교훈을 넘어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더 알게되지 않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안에서 쓰레기를 1년 동안 줍고 다녔었다. 당시 교회 전도사님께서 학창시절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학교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기도하였다 간증해 주셨었다. 나 또한 목사 아들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싶었었고, 교회에서는 열심으로 섬김과 동시에 학교에서조차 쓰레기를 주우며, 할 수 있는 한 선한 것을 모두 행한다면 전도사님이 만난 하나님의 사랑을 나도 경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놓여진 쓰레기를 보며 이것을 줍는 것이 맞는지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학교와 아파트를 위해 기도해왔는데 학교에서 쓰레기를 주운것처럼 이곳 아파트에서도 쓰레기를 줍는 것이 맞는 논리였다. 동시에, ‘앞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쓰레기를 지나가는 골목과 길에서 주워야 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며 말이 안된다 느꼈었다.
쓰레기를 줍는다는 선한 행동을 할 때 도대체 학교와 아파트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신앙과 삶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선한 행동을 선택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이 아닌지, 이 두 가지의 갈등 속 결국 쓰레기를 주워 집으로 들어왔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였을까 하는 생각은 10년이 지나 30대가 되었음에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학교와 아파트 사이에서 했던 고민이 이제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과 교회 사이, 현실과 신앙사이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 꿇어 앉은 부자 청년은 절박하게 질문하였고 또한 어릴때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다 외치며 자신의 노력을 주님께 아뢴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그 청년 또한 세상의 어느 누구도 선한 계명을 모두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감정, 갈등, 절박함 속 주님 앞에 꿇어 앉아 있는 부자 청년을 향해성경은 예수님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막 10:20-21)
2026년 10월 26-30일 오클랜드에서 공연하는 ‘부자 청년’ 뮤지컬을 통해 성령님께서 어둠 속 헤메이는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인도해주시기를 소망한다. 또한, 모든 준비과정 속 LoveU 뮤지컬 팀을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참고문헌: Evans, Craig A. Mark 8:27-16:20. Word Biblical Commentary 34B. Dallas: Word Books,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