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던 그 챗지피티가 상용화된 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엔 다들 “이거 신기하네, 신박한 장난감이네”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지식 노동을 넘어서 삶의 거의 모든 자리에서 사람을 대신하게 되고 사람의 생각과 능력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3년 전 AI가 나오고 영향받을 직업들에 대한 경고는 우려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실제로 사람들의 직업을 수없이 빼앗아 버렸고 우리 삶 전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을 맡기는 ‘생각의 외주화’ 현상입니다.
최근에 뉴질랜드 정부가 긴축 예산을 편성하면서 노인 케어 서비스 계약 구조를 재편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헬스 서포트 워커들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들 일자리는 AI 시대에도 꼭 필요하고, 오히려 더 필요할 것이며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어르신 손 잡아드리고, 목욕시켜 드리고, 말벗을 해드리던 서포터 워커의 일은 지식 노동이 아닌 사람의 체온이 담긴 일들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지만 AI 시대가 도래하자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에서 사람이 밀려나고 노동의 소외가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AI 창작물에 대한 피로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플라스틱과 나일론이 나왔을 때 그 매끈함에 매료되었지만, 대량 생산과 값싼 편리함이 플라스틱 쓰레기에 질리게 하듯 인공 창작물 역시 그 신박함을 넘어 인공지능이 만든 글이나 그림, 음악들을 쓰레기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인공지능 창작물에는 ‘인공지능 지문’을 표시하여 사람 창작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구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외주화
챗지피티와 같은 거대언어모델은 방대한 글을 순식간에 처리합니다. 반면 우리 인간의 작업 기억은 원래 일곱 개에서 네 개 남짓밖에 못 붙잡는다는 기억의 매직 세븐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에 비해 턱없는 이런 단기 기억 능력조차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의 기억력도 판단력도 조금씩 떨어질 거라는 걱정을 사람들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이웃집 마당이 푸르고 부러워서 우리 집 마당 잔디밭을 푸르게 가꾸려고 재료를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종류가 너무 많아 한참을 고르지 못하고 이것저것 결정 장애를 보이고 있었는데 옆에 한 분이 매장 전체 사진을 찍어서 AI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AI의 비교분석에 따라 몇 분 만에 딱 맞는 제품을 골라 갑니다.
저는 그 장면에 신세계를 본 것 같아서 “와, 정말 편하네” 하고 감탄했습니다. 저도 따라 해 보니 판단이 쉬워졌습니다. 더 이상 결정 장애를 겪으며 몇 시간 동안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판단과 결정이 이렇게 쉬워지니까 처음엔 참 좋았습니다. 이게 반복되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 힘, 생각의 근육이 조금씩 약해진다고 느껴집니다. 예전 같으면 고민하고, 비교하고, 실패도 해보고 그랬을 텐데 이제는 그 과정 자체가 사라집니다. 더 나아가 오늘 뭐 먹지, 메시지를 뭐라고 보내지 같은 아주 사소한 결정까지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묻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법률이나 회계, 의학처럼 논리가 중심인 영역에서는 인공지능이 참 효과적입니다. 세금 계산이나 법조문 찾는 건 저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합니다. 그런데 신앙 상담과 심방으로 넘어가면 오류가 많아집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논리로 규정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이런 감정을 다룰 때 인공지능에게 가장 큰 변수는 인간 자체입니다. 어제 슬펐던 이유와 오늘 슬픈 이유가 다른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그런 인간의 감정을 불확실하게 겪는 대신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학습해서 그걸 그대로 답으로 내어줍니다. 늘 내 편 들어주고, 늘 옳다고 해 줍니다. 그게 참 달콤합니다. 그런데 이런 응답이 감정적 의존을 만들고, 그 증상은 중독이랑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답답한 얘기를 사람한테 털어놓기 전에 인공지능한테 먼저 털어놓는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습관이 되면 우리는 생각을 외주화하게 되고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소홀히 여김을 받은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디지털 디톡스 8, 9단계
디지털 디톡스 8단계는 디지털 과의존으로 인해 내가 상처 준 사람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단계입니다. 디지털 과의존과 인공지능에게 내어준 그 시간이, 사실은 누군가의 자리를 비워낸 시간이었다는 걸 한번 적어보는 것이 상처를 주면서도 모르는 우리의 감정과 인간 존재의 회복의 출발입니다. 배우자와 나누던 대화의 그 자리로, 자녀가 씨름하던 질문에 함께 있어 주던 그 자리로, 이웃의 안부를 묻던 그 자리로, 내가 있어야 했던 자리에 내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요즈음 자녀가 신앙적인 질문을 가지고 와서 물어봅니다. 그럴 때면 “잠깐만, 검색 좀 해보고” 하고 디지털 세계로 빠져듭니다. 그러면 자녀는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런 잠깐의 기다리라던 시간이 쌓이면 자녀는 점점 더 부모와 소통이 멀어지게 됩니다. 소통이 없다면 그렇게 잠깐만 외면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소홀했던 부분의 리스트를 정직하게 적는 것입니다.
8단계가 돌아보는 것이라면, 9단계는 실천입니다. 돌아보기만 하고 끝나면 그건 반성이지 회복이 아닙니다. 9단계는 직접 보상의 원리를 실천하는 단계입니다. 사과의 리스트가 작성된다면 문자 대신 전화나 얼굴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소외와 방치에 대한 사과와 직접적 보상과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보내는 문자 대신 전화를 하고, 전화 대신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으로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눈을 마주보고 상담하던 그 자리에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채우고, 이웃에게 직접 찾아가는 발걸음을 회복하는 과정을 실천합니다. 효율은 좀 떨어집니다. 인공지능은 3초면 답을 주는데, 뉴질랜드 같은 사회에서는 전화 걸고 약속 잡고 만나러 가는 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대신 만남의 깊이와 따뜻함이 다시 채워집니다. 그건 인공지능이 절대 줄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도 AI가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요즘 기도문을 써달라고 하고, 설교 듣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즉시 인공지능한테 묻고 그럴듯한 답을 얻습니다. 성경 일독을 하면서 성경 요약이랑 큐티 본문 해설까지 의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성경을 공부할 때 본문을 보지도 않고 말씀을 조각조각 보게 됩니다. 심지어 성경책이 없는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말 못 할 고민도 목회자보다 인공지능한테 먼저 털어놓는 일이 이제는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판단하는 법이 없고, 야단을 맞지도 않으며 “죄송합니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꿋꿋이 원하는 답을 만들어 제시해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24시간 언제든 답해 줍니다. 이제는 교회에서도 성경의 정보를 얻는 걸 넘어서, 인격적인 만남 자체를 인공지능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기도라는 건 정답을 찾는 연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관계의 언어로 하는 대화입니다. 답이 딱 떨어지지 않아도 괜찮은 게 기도입니다. 오히려 답이 안 떨어져서 계속 붙잡고 씨름하는 게 기도입니다. 인공지능이 위로는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 시간,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는 그 과정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신앙을 외주화하면, 결국 하나님과 이웃 사이의 관계가 얕아집니다.
교회, 그리고 우리가 할 일
디지털 과의존에서 회복하기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번호까지 매겨서 방안을 제시해 줍니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심방과 소그룹 회복, 디지털 안식일, 돌봄의 우선순위 회복. 다 맞는 말이고 하나도 틀린 게 없는데 어딘가 건조합니다. 이런 방안들은 사실 교회가 공동체로 튼튼하게 서 있던 시절의 대안에 가깝습니다. 요즘처럼 다들 바쁘고 흩어져 있는 시대에 그 좋은 방안들을 실제로 실천할 힘이 우리한테 남아 있는지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마트폰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덤폰 사용 운동이나 인공지능을 반대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디지털 디톡스는 디지털 과의존과 인공지능에 의존하여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사소한 만남부터, 조금 더디더라도 따뜻한 손을 내미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심코 내어준 그 자리가 누구의 자리였는지 한번 적어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한 사람에게 전화 한 통 거는 것으로 이어지는 작은 움직임은 지식의 외주화와 신앙의 외주화를 넘어서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