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을 배울 때, 보통 이탈리아 가곡으로 시작한다. 음절이 끊어지는 한국어와 달리 이탈리아어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좋은 소리를 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악 전공자들도 보통 1학년 때 이탈리아어로 기본기를 다지고, 3학년쯤 되어야 한국 가곡을 배우기 시작한다. 또한, 기본기를 배우는 동안 한국 가요나 일반 노래를 자주 부르면 예전의 잘못된 습관이 다시 살아나 어렵게 익힌 발성을 잃기 쉽다는 말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 역시 성악을 배우며 소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한국 가요나 CCM을 부르는 것마저 부담스러워졌다. 실제로 주일 예배에서 찬양을 부른 뒤 성악 레슨을 받으러 가면, 선생님은 매번 되살아난 나쁜 습관들을 지적하셨다. 처음에는 그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 역시 찬양을 부른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소리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면서도 성악처럼 소리와 공명, 호흡과 구강 구조의 근육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었고, 정작 가사에 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연습할 때는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뜨겁게’를 되새기며 노래했지만 주일이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복잡해져 갔다.
30년 넘게 마음을 다해 불러왔던 찬양이었지만 노래의 원리와 기법을 배우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자 더 이상 이전처럼 찬양할 수 없었다. 어떤 시점부터는 찬양의 한 구절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가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주변에서는 이것도 배움의 과정이며 언젠가는 지나갈 시기라고 말했지만 30년 동안 몸에 익은 발성과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결국 성악을 배우는 5년 내내 예배의 찬양 시간이 답답하고 고역스러웠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모순적이고 혼합된 신앙을 경험하며 나타난 결과였다. 나의 찬양에는 하나님을 높이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닌 더 좋은 소리를 내며 노래 실력을 발전시키고 싶은 열망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수한 자리에 나 자신의 소망이 한 스푼 섞여 있었고, 그 한 스푼의 열망을 나는 적당히 타협하고 정당화하며 살아왔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 7장 21-23절일 것이다. 예수님께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떠나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실제적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헌신하고, 공예배에 꾸준히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말씀은 어쩌면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도 큰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동경하지 않는가? 능력 있는 설교자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러한 자리에 서길 원하지 않는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이 말씀 속에서 큰 권능을 행했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향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가 아니다”고 말씀하셨을까? 어쩌면 그들의 사역과 열심 자체가 문제가 아닌, 그 사역 안에 섞여진 한 스푼의 열망, 즉 사람들의 이익이 혼합된 신앙의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뮤지컬 ‘내 어린 양을 먹이라’에서 오병이어 장면을 구상하며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오늘날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한 소년의 작은 헌신을 통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 소년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러한 상상 속, 뮤지컬 장면에 소년의 부모를 등장시켜 보았다. 그 부모는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은 이 기적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 일어났음을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주변 사람들도 그 소년을 특별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칭찬하고, 다른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도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길 원하며, 소년의 부모에게 비결을 묻는다.
그러자, 소년의 부모는 어릴 때부터의 율법 교육을 강조하며, 예수님도 소년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을 일으키셨음을 확신하고, 모든 사람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겉으로 보면 이들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습은, 마치 오늘날 유명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업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우리들이 그들의 간증을 부러워하고, 어떻게 그런 은혜를 받았는지를 분석하려 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간증의 유행 속, 우리는 예수님이 그 기적과 간증보다 한 발자국, 때로는 더욱 뒤에 놓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의 헌신과 특별함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우리의 섬김과 인내가 강조되면 될수록, 누가 그 기적을 일으키셨는지 놓치고, 기적의 결과만 이야기될 수 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일으킬 존재로만 사용하기도 하고, 예수님이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한 목적, 즉 복음의 의미는 전혀 관심없어 한다.
소년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소년이든 소녀든, 빵 한 조각이든 무엇이든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기적이며, 그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담겨져 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뮤지컬 속 군중은, 철저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이용한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자랑과 필요 및 만족을 예수님보다 더 앞세운다. 개인의 열망과 욕심을 포기하지 않은 채 예수님의 사역에 그것을 한 스푼 섞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중심적 신앙 즉 예수님보다 한 발짝 앞에 둔 자신의 열망들이 지적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들은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 수많은 신앙적 미사여구로 자신들의 모순을 포장하려 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나는 이 장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이자, 내가 찬양과 열망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모습으로 보았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소리로 찬양하겠다는 열망처럼 포장되었겠으나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다른 사람들을 노래로 감동시키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만약 누군가가 나의 이러한 성악 창법에 대한 집착 및 모순을 발견하고 지적했다면, 어쩌면 나는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돌이키기보다 여러 신앙적 명분과 다른 사람들의 예시로 내 모습을 정당화하려 했을 것이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열망과 성공 및 편안함을 복음에 한 스푼씩 섞어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이 섞인 복음은 결코 하나님의 진리도, 뜻도 될 수 없다.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자기중심적이자 혼합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앞선 열망과 혼합된 신앙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숨김없이 토해 내며, 엎드려 회개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