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지막 기원(祈願)

마지막에는, 부드럽게,
그 강력한 요새 같은 집의 담으로부터,
그 꽉 물린 자물쇠들의 걸쇠로부터—그 단단하게 닫힌 문들의 아성(牙城)으로부터
내가 바람처럼 퍼져나가도록 해주세요

내가 조용히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게 해주세요
부드러움의 열쇠로 자물쇠들을 열고—속삭임으로,
문들을 열어주세요, 오 영혼이여!

부드럽게! 인내심을 잃지 마시고!
(강하도다 당신의 붙잡는 힘은, 오 필멸의 육신이여!
강하도다 당신의 붙잡는 힘은, 오 사랑이여.)
_월트 휘트먼(1819~1892)

백세시대를 외치는 요즈음이지만 이 시는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건강하게 그리고 사람 답게 살다가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단서가 붙는다. 두발로 걸어 다닐 수 있고 온전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서 살기를 원하지, 그 누구도 병상에 누워서 자기 몸도 추스르지 못하고 고통을 겪으며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목숨을 이어가기 원하지 않는다.

19세기에 태어나서 칠십이 넘도록 살았던 휘트먼은 당시로서는 장수했던 사람이다. 그가 이 시를 쓴 때는 아마도 죽음이 가까웠던 삶의 말년이었을 것이다. 삶을 여행으로 생각하고 평생 자신의 여행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던 그는 죽음도 삶의 여정의 한 단계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럽거나 소란스럽게 죽음 너머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첫 연 끝 구절을 ‘내가 바람처럼 퍼져 나가도록 해주세요’라고 하고 둘째 연 첫 구절을 ‘내가 조용히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게 해주세요’라고 시작하는 이 시를 읽으면 삶과 죽음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그의 사생관(死生觀)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의 육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서 첩첩이 담을 쌓고 요새 같은 집을 만들고 단단하게 문을 만들어 잠그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놓는다. 나이 들어서건 혹은 젊어 서건 보통의 경우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을 맞기 위해 담을 허물고 요새 같은 집의 단단히 닫힌 문을 열고 나가야 하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바람처럼 퍼져 나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지막 연에서도 부드럽게 인내심을 잃지 말라고 부탁한다. 마지막 두 절을 괄호로 묶어 놓은 이유는 서로 대칭되는 두 절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필멸의 육신이 붙드는 힘이 강한 것은 삶(mortal)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 너머의 영원(immortal)을 갈구하는 사랑의 힘도 강하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시인은 결코 인내심을 잃지 말고 부드럽게 바람처럼 미끄러져 나가도록 해달라고 영혼에게 부탁한다.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의 죽음
이 시를 읽다 보면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의 평화로운 죽음이 생각난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였던 스코트는 서구 사회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자연적인 삶을 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 평생의 동반자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과 같이 살다가 자연적인 죽음을 선택해 육체를 벗어난다.

스코트가 죽은 뒤 헬렌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에서 보면 그들에게 죽음이란 종말이 아니라 옮겨감이었고 삶의 두 영역사이에 있는 출입구였다. 스코트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네’라고 썼다.

자연의 삶 속에서 건강했던 스코트도 100세가 가까워지며 기력이 쇠약해지자 아내 헬렌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쓸모가 있는 만큼 오래 살고 싶소. 내가 쓸모 있는 존재일 수 있는 한 살고 싶소. (하지만) 내가 당신을 위해 (땔)나무를 나를 수조차 없다면 나는 죽는 게 나을 거요.”

100세 생일 한 달 전부터 스코트는 음식을 끊었다. 단식에 의한 죽음이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평소부터 원했던 방법이었다. 1983년 8월 24일 헬렌은 그의 침상에 같이 앉아 조용히 그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헬렌은 그에게 속삭였다. “썰물처럼 가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사랑이 당신과 함께 가요. ——”

스코트는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좋 – 아,”하며 마지막 숨을 쉬고 갔다. 헬렌은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갔음을 느꼈다.

100세 시대 우리의 선택
생명은 창조주에게 달려있는 것이니 단식에 의한 죽음도 자살이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스코트의 죽음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다면 떠날 때가 되고 살아날 희망이 전혀 없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약의 힘으로 억지로 붙들듯 생명을 연장하는 현대 의학도 창조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 답게 고통받지 않고 존엄하게 죽기를 원하는 안락사를 인정하는 나라들이 하나 둘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직도 불법으로 간주하여 이를 방조하는 행위를 범죄로 처벌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원치 않으면 연명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따라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하고 등록증을 받아 놓으면 스스로도 가족도 마지막 가는 길이 보다 편안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택은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창세기 1장)’이 고통받으며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기를 하나님도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2)’며 이 땅에서의 삶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려 애쓰지 말고 편안한 몸과 마음의 자세로 죽음너머에 예수께서 준비해 놓으신 처소(요한 14:2)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월트 휘트먼의 시도 죽음이 끝이 아니기에 육신의 닫힌 문을 열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죽음으로 흘러 들어가라는 영탄(永嘆)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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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