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Evita’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통의 메시지에서 시작되었다. ‘Broadway Light’ 공연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Lizzy라는 안무 감독으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Orewa에 위치한 Centrestage Theatre에서 진행되는 뮤지컬 Evita의 안무를 맡고 있었고, 그날 자신의 학생 공연을 보러 왔다가 무대 위에 있던 나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있을 오디션에 한번 참여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Evita’는 단순한 지역 공연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었고, ‘Don’t Cry For Me Argentina’ 같은 곡은 한국에서 익숙할 정도였다. 제대로 된 뮤지컬 무대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이 제안은 기쁘게 다가왔고 곧바로 오디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Centrestage는 오클랜드에서도 높은 수준의 공연을 올리는 극단이었고, 오랜 경력을 가진 배우들이 꾸준히 참여하는 곳이었다. 실제로 나
와 함께하는 배우들 중에는 20~30년 이상 무대에 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동시에 순수한 열정으로 참여하는 아마추어 배우
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앙상블로 합류하게 되었지만 현실적인 벽은 분명했다. 영어로 진행되는 리허설과 디테일한 연기 지시들, 기본기가 필요한 춤 동작들 모두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스토리가 분명한 작품이었기에 주연과 조연은 명확한 대사와 흐름이 있었고, 앙상블은 대기 시간이 많은 구조였다. 게다가 약 3개월 반 동안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화요일, 목요일 저녁과 일요일 6시간의 연습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즐거웠다. 뮤지컬이라는 세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고, 리허설이 없는 날에도 일을 마치면 집에서 악보를 분석 및 가사를 외우고, 다른 배우들의 동선까지도 머릿속에 그려 보며 리허설을 준비했다.
뮤지컬 배우로서 연습에 참여하는 것과 동시에 사실 이 시간을 통해 내가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창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배움이었다. 뮤지컬은 장면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연출, 음악, 안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했고, 그 과정은 순서대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연출감독 Reg의 작업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모든 것을 지시하기보다 배우들과의 소통 속에서 장면을 만들어갔다. 예를 들어, 한 장면에서 군중의 열광을 표현해야 할 때,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축구 경기장에서 경험했던 열기를 이야기하며 배우들에게 그 감정을 상상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위치를 바꾸고, 소리를 만들어내고, 다음 리허설에서는 그것을 더 발전시키며 점점 완성도를 높여갔다.
이러한 방식은 때로는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순간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나는 창작이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배웠다.
우리가 올린 ‘Evita’는 대사와 노래는 동일했지만, 장면의 구성과 표현은 다른 극장의 공연들과는 전혀 다르게 만들어졌다. 실제로 여러 극단 관계자도 그 창작적인 연출에 놀라움을 보일 정도로 거의 모든 장면이 새롭게 빚어졌다.
그 덕분에 나 역시 다른 ‘Evita’ 공연 영상들을 찾아보며 Reg가 어떻게 다르게 장면을 풀어냈는지를 비교해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연출 방식은 지금
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오늘날 내가 배우들과 함께 장면을 설명하고 동시에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글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여전히 창작에 서툰 아마추어에 가깝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창작자에게 ‘영감’(Inspiration)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는 사실이다. 짧은 연극 하나를 만들 때조차도 아이디어와 영감이 얼마나 절실한지 늘 느낀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2AM의 ‘죽어도 못 보내’라는 곡이 작곡가가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의 슬픔과 그리움을 보며 받은 감정
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의 아픔과 정서가 그대로 곡에 담겼고, 그래서 듣는 이들에게도 깊이 전달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처럼 영감은 분명 어떤 순간, 어떤 경험 속에서 찾아 온다. 그렇다면 그 근원은 어디일까? 때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창작의 감
동과 아이디어들이 과연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감들인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뮤지컬 ‘내 어린 양을 먹이라’에서는 총 15곡 중 9곡을 창작하게 되었는데, 남섬에 있는 김나래 작곡가를 오클랜드로 초청해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곡을 만들어갔다.
나는 각 장면에 대한 해석과 마음, 그리고 참고할 만한 음악을 나누었고, 김 작곡가는 떠오르는 멜로디와 화성을 풀어내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여기에 최유진 안무가도
함께하며, 음악에 맞는 움직임과 동선에 대한 의견을 더해갔다.
연출, 음악, 안무가 서로의 영역을 넘어 삶과 생각까지 나누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그 과정은 매우 깊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메시야를 따르라’라는 곡은 오병이어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 했던 장면(요6:15)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나는 이 장면을 단순한 환호가 아닌, 어딘가 광기 어린 열광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마치 출애굽 당시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왜곡된 기대와 욕망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 이미지를 나누자 음악은 점점 단순하면서도 웅장하게 고조되었고, 안무는 절도 있는 군무로 완성되어 군중의 집단적인 힘과 방향성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장면은 십자가의 길을 향하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기대를 품은 군중의 대비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이 되었다.
처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만났을 때 나눈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7절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여러 번의 공연과 창작을 통해 배운 것들이 있지만, 그 당시 첫 창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세사람 모두에게 낯선 도전이었고, 그 과정을 이끌어야 하는 나의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씀을 붙잡으며 모든 좋은 것과 온전한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었다. 그 고백 위에서 창작을 시작했을 때 신기하게도 필요한 순간마다 아이디어가 열리고 방향이 잡히는 경험을 하였다.
물론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나은 표현을 찾기 위해 애쓴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며 분명하게 느낀 것은 이 작품은 내 힘으로 창작한 것이 아니다는 마음이었다.
창작에 대한 기본기도 없는 내가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말씀과 생각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때로는 넘쳐나는 생각들 앞에서 하나님께 분별의 영을 구하며 나아갔었다.
그렇기에, 이 뮤지컬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완성까지 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어려움과 눈물의 시간 속에서도 이 이야기에 나를 부르시고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올려드린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약
1:17 새 번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