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의 비누(be new)

“거긴 요즘 날씨 어때? 여긴 이제 찬바람 불고 꽤 쌀쌀해…”

얼마 전 한국에 있는 지인과의 통화. 뉴질랜드는 한여름이 오고 있고, 한국 여름처럼 후덥하지는 않지만 해 뜨면 엄청 뜨겁노라고. 아시다시피 이 동네는 자외선이 엄청 쌔서 피부암이 많고, 선글라스 안 쓰면 백내장에 걸릴 수 있다는 얘기를 다소 오바해서 해 주었다. 지인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로망이라며, 타 죽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이곳에서 성탄절을 맞아보고 싶다고 했는데, 반대로 나는 코끝이 쨍하게 시리고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앙칼진 한국의 겨울이 그립다고 했다. 후후 불며 파간장 찍어 먹는 길거리 오뎅과 함께…

그러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디가 더 살기 좋고 나쁜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팬데믹 이후 생활이 팍팍해졌다는 얘기. 물가가 너무 올라 장보다 깜짝깜짝 놀란다는 것은 두나라 다 공통적인 상황인 것 같다. 한국은 장사가 안되 자영업자들이 다 망하고 있고, 상가에 빈 가게가 늘어 간다고… 나는 거기에 대해 뉴질랜드는 일자리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 떠났다고 반격했다.


“그래도 너희는 미세먼지 걱정 안하고 살쟈나. 여긴 날씨 검색하면 미세먼지도 같이 떠.”

맞다. 한국엔 미세 먼지가 있었지… 여기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미세먼지가 뭐~에~요~?’라는 반응이 나오겠지만 이민 오기 전까지 나도 매일 미세먼지 농도를 예의주시하며 집에는 공기청정기를 24시간 돌리고, 오늘은 마스크 써야 하네, 내일은 간만에 괜찮네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는 옷에 때도 많이 타는데 빨래 널 곳이 마땅치 않아 드라이크리닝을 심심찮게 맡겨야 했고, 집에서는 빨래를 표백도 하고 삶기도 하고 지지고 볶고 그랬었구나. 뉴질랜드 와서는 세탁에 크게 신경 안 쓰고 사는데, 이것도 여기 삶에 플러스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처음 뉴질랜드 이민 왔을 때는 두꺼운 파카 안 입어도 되는 무딘 겨울과 뜨거운 햇살 아래 보내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에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져서 참 좋았었다. 어디에나 바다와 공원이 있는 깨끗한 자연, 약간은 게으른 듯 유유히 흘러가는 일상의 속도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은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 버린 나의 마음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묵상하고,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익숙해진 일상은 점점 빛이 바래고 현실에서 못 누리는 것들이 상상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게 되었다. 코끝 쨍하게 추운 날 후후 불며 먹는 길거리 오뎅처럼…

지인과의 통화를 마치며 우리는 모두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게 없는 것,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마음에는 반짝이는 보석과도 같은 행복이 박혀 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녀석은 일상 속에 방치해 두면 미세먼지 따위의 더러움이 쌓여 점점 행복의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즈음이면 몸도, 마음도, 옷도 얼룩져 지저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집에 오면 우리는 보통 가장 먼저 샤워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더위에 일하며 땀과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비누로 깨끗이 씻고 나면 마치 다시 태어난 듯한 상쾌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비누로 몸을 씻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수시로 씻어낼 수 있다면… 살아 가면서 겪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끊임없이 비교와 소비로 우리를 내모는 세상의 트렌드들,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얼룩져 초라해진 마음을 깨끗이 씻어낸다면, 그 아래 묻혀 있는 행복이 늘 반짝이며 빛나게 되지 않을까. 어디에 살고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행복하고 감사하려면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새로운 심령으로 하루하루, 아니 필요하다면 수시로 새로운 마음을 입으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으리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그런 자족과 감사를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께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어쩌면 가장 낮은 자리인 베들레헴의 한 여관집. 그것도 객실이 아닌 마구간의 구유에 놓이셨다.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만 추구하는 인생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분께서 가장 천한 모습으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인류 구원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마치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낮아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만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한 것은 당시 제국을 다스리는 왕이나 귀족들이 아니었다. 화려한 궁정음악도, 팡파레가 터지고 비둘기가 날아가는 거창한 의식도 없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며 하루 종일 수고하고 애쓰던 범인들이었다. 그들은 즉시 달려가, 아기 예수의 나심을 축하하며 경배했다.

그리고 성탄을 축하한 또 한 부류는 멀리 동방에서부터 별을 보고 찾아온 세 사람으로, 우리에게 동방박사라고 알려진 이들이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황금, 유향, 몰약을 바쳤다. 황금은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예수님이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한다. 유향(Frankincense)은 유향나무에서 추출하는 향긋한 수지로 제사때 하나님께 올리는 향으로 쓰였고, 예수님의 신성과 거룩하심을 의미한다. 몰약(Myrrh)도 유향과 마찬가지로 나무에서 추출한 수지인데 상처를 아물게 하고, 죽은 이를 방부하는 데 쓰이던 귀한 약재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했다.

동방박사들의 세가지 선물은 예수님의 신분, 생애와 사명을 예언하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신 창조주의 위대한 여정을 암시하는.

나도 가끔씩 유향과 몰약이 섞인 비누를 만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앞에 놓인 동방박사들의 선물을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또 다짐해 본다. 언젠가 황금도 들어간 비누를 꼭 만들어 보겠다고.

2025년 한 해도 이제 저물어 가고, 열 두 회를 달려온 나의 비누 이야기도 어느덧 마지막에 이르렀다. 늘상 쓰는 비누를 소재로 그동안 유서 깊은 신앙지의 취지에 맞게 글을 쓰느라 본인의 주제에 넘게 많이 무리를 했다. 내놓기 부끄러운 글들이었지만 그래도 독자들의 너그러우심으로 잘 읽어 주셨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고 잘 만드는 수제비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인생을 깨끗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조금이나마 전달되었기를 바래 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Let’s 비누(be new)!

이전 기사‘처음’ 그 아름다운 말
다음 기사Inhabitants of the Forest
구 진
2019년 남편과 딸과 함께 오클랜드로 이민 와 살고 있으며, 수영강사로, 수제 비누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지난 해, 크리스천라이프 아카이브에서 비누 전시회를 가졌다. 많은 분의 따뜻한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수제 비누의 세계를 독자와 나누고 틈틈히 수제 비누 공방도 열어 개인의 용도에 맞는 고급진 비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