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로부터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은 쉽게 잊지만 어떤 일은 결코 잊지 못한다. 잊기는커녕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어떤 일은 어느 순간 무의식의 표면을 뚫고 나와 삶을 흔들고 가슴속을 회한과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꽉 채워놓는다.
40년 전 어머님에게 발병한 폐암이 그랬다. 그때 왜 우리 가족에게 그런 엄청난 비극이 몰아쳤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폐암입니다. 진행이 꽤 된 것 같아 정밀검사를 해야 하니 입원 수속을 하세요.” 어머님을 진단하고 나온 의사가 밖에서 기다리던 우리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폐암이라니요? 어머니는 평생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으셨는데 폐암이라니요?” 청천벽력과 같은 의사의 말에 정신이 없었던 내가 한 질문에 의사는, “담배가 아니어도 폐암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밀검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답하더니 뒤따르던 간호사에게 우리를 맡기고 가버렸다.
그때 우리는 부모님과 다섯 남매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가난했던 그 시대 대다수의 가정이 그랬듯 자식들 돌보기 위해 하루도 삶의 터전에서 쉬실 수 없으셨던 부모님이셨다. 그러던 때에 돌연 외국에 나갔던 막내딸이 사고로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고 딸의 죽음을 슬퍼하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석달 뒤 12월 그믐날에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전화를 받고 우리가 달려갔을 때 영안실 앞에 백지장처럼 앉아 계셨던 어머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어머님께 폐암 진단이 나온 것이다.
정밀검사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암세포가 사방으로 전이되어 수술은 전혀 불가능하고 항암주사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데 부작용이 무척 심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님이 얼마나 생존하실 수 있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의사는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안 됩니다, 하나님! 어머님만은 안 됩니다. 여동생을 가져가고 아버님을 가져갔으면 됐지 어떻게 어머님마저 가져가려 하십니까? 안 됩니다, 어머님은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가져가십시오!’ 말도 안 되는 투정이었지만 나는 누구에겐가 부르짖어야만 했고 끝내는 병원 복도 바닥에 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때, 나와 아내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다. 여동생이 죽고 이어서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삶의 한구석이 무너진 것 같아 아내와 같이 교회에 나갔다. 미션 스쿨(Mission School)인 중학교를 다니며 성경 공부도 했고 교회도 다녔기에 중학교 졸업 후 처음 나가는 교회이지만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항암치료가 준비되면 연락할 테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어머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게 문득 성경 구절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는 구절이었다.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구절인지는 몰랐지만 그 구절이 떠오르면서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어차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못 살리는 의술이라면 오히려 하나님께 매달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성경책을 뒤져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있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는 구절을 찾아냈다. 그리곤 곧장 성경책을 들고 어머님께 다가가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총동원해서 어머님을 설득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치료해 주실 터이니 같이 교회에 나가자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어머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뿐만 아니라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얘야, 너도 너희 아버지가 어떻게 태어나셨는지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독자이셨다. 아버님 위로 고모님이 한 분 계셨는데 고모님이 태어난 뒤로 10년이 넘도록 할머니에게 태기가 없자 할머니께서 절에 나가셔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려 얻은 아들이 아버님이셨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열심히 절에 다니셨고, 어머님도 시집오신 뒤 할머니와 같이 절에 다니셨다.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병 낫게 해달라고 종교를 바꾼단 말이냐? 난 못한다.” 그리고 어머님은 벽을 향해 돌아누우셨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동생이 죽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마당에 어머님까지 이대로 돌아가시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막막하기만 했다. 혼자 울부짖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며칠을 보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는 구절만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다시 어머님께 다가가 힘을 다하고 지혜를 다해서 애원하듯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 부처님은 훌륭하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 말씀대로 세상을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사람이지 신이 아닙니다. 신이 아니기에 살아가는 좋은 길은 알려주실 수 있지만 병을 고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없습니다. 제가 배운 성경 말씀에 의하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어머니, 제 말을 믿으시고 같이 하나님께 매달려 함께 기도하시지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고맙다, 아들아.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살아서 나중에 조상님들을 무슨 낯으로 뵙겠니? 제발 나를 이대로 있게 해다오. 내가 부탁하마.”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어머님은 듣지 않으셨고 나는 기진해서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목사님께 부탁드려보면 어떨까요? 목사님 말씀이라면 들으실지 몰라요.” 밖으로 나오자 방 밖에서 우리 모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아내가 내게 말했다. 우리가 몇 달 전부터 나가던 교회의 목사님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한양 공대를 나와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자꾸 불러서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신 분이었다.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안되셨기에 우리가 교회에 나가자 반갑게 맞으시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이런 목사님이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내에게, “좋은 생각이오. 우리 오늘 오후에 찾아뵙시다,”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목사님을 교회에서 뵙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어머님을 만나달라고 부탁드렸다. 목사님은 쾌히 승낙하시며 “지금부터 어머님을 위해 기도한 뒤에 저녁에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께 저녁에 목사님이 오실 거라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이 왜 오시냐고, 나는 결코 교회에 안 간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님께 그냥 인사하러 오시는 것이니 제발 만나만 보시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어머님은 말씀은 안 하셨지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저녁에 목사님이 오셔서 우리가 방으로 맞아들이자 어머님은 일어나 앉으셨다. 반갑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는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목사님이 어머님에게 큰절을 올리더니 일어서서 “어머님, 오늘부터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어머님이 무척 당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 목사님이시잖아요. 어서 앉으세요.” 그러자 목사님이 다시 어머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저는 어머님에게는 목사가 아니고 그냥 아들입니다. 저를 아들로 받아주십시오. 그래야만 앉겠습니다.”
마치 떼를 쓰는 아이처럼 어머님을 대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어머님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이구, 그러지요. 목사 아들이 생기면 좋지요. 제발 앉으세요.” 그러자 목사님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리더니 “고맙습니다. 이 절은 아들로 드리는 절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매일 찾아와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매일 저녁 집으로 오셔서 어머님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교회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셨다. 그처럼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목사님이 어머님도 싫지는 않으셨나 보다. 그렇게 보름쯤 지난 어느 주일날 아침 어머님이 “얘, 그 목사님 계시는 교회가 어디니? 멀지 않으면 오늘 같이 가보자!”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머님을 모시고 같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말 한마디였다. 어머님의 마음을 움직인 말은 거창한 구원의 교리도 아니었고 성경 말씀도 아니었다. “어머님, 오늘부터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는 딸을 잃고 남편을 잃고 건강마저 잃은 한 여인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졌던 것이다. 그 말 한마디의 위력은 참으로 커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비록 어머님의 병은 완치되지 않아 얼마 뒤 돌아가셨지만, 짧은 신앙 생활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웃으시며 소천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돌이켜보면 연약한 여인의 가슴에 딸과 남편을 묻고 고통 속에 이 땅에서 사시느니 고통도 슬픔도 없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딸과 남편을 만나 사시는 편이 한결 행복하셨을 것이다.
“어머님, 오늘부터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그 말 한마디로 우리 가족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 동갑내기 목사님은 지금은 은퇴하시고 미국에서 살고 계신다. 목사와 성도 이상의 친교를 평생 나누고 있는 나와 그 목사님은 지금도 가끔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며 옛날을 회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