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은 흔히 ‘대제사장의 기도’ 혹은 ‘고별 기도’라 불린다. ‘대제사장의 기도’라 하는 이유는, 레위기 16장에 나타난 속죄일의 기도와 같이 예수께서 십자가라는 희생 제사를 앞두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드린 간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별 기도’라는 이름은 요한복음 13장 31절부터 이어진 고별 담화의 결론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남긴 마지막 가르침이 기도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도는 단지 예수님 개인의 기도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정체성과 사명을 지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유산이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에 근거해야 함을 가르쳤다. 교회의 생명과 사역은 이 연합에서 비롯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 연합 속에서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에 동참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자신을 위한 기도(1~5절):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17장은 단순한 기도 형식이 아닌, 예수께서 아버지와 연합된 관계 안에서 기도하신 것임을 보여준다. 곧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 그 기도에 동참하는 행위가 된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아버지여”라 부르며 기도를 시작한다. 요한복음 17장에는 무려 39번이나 ‘아버지’라는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아들과 아버지의 깊은 친밀성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나이다”라고 선언하며, 이제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할 때가 왔음을 고백한다. 그 사명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로 “영생을 주는 일”이었다(요 17:2).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성령으로 태어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주리지 않는 것이다. 영생은 지금 경험하기도 하지만 부활 때에 완성된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듣고 믿는 자에게 그 영생이 주어진다(요 3:15-16, 36).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무엇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을 때, 이 ‘앎’은 정보를 아는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순종과 사랑, 교제를 통한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아는 것”은 “응답과 순종 및 교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친밀한 교제를 통한 현재적 경험을 통한 앎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을 통하여 영광 받으셨다(요 17:4). 그리고 이제 아버지께 간구하기를, “창세전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다시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요 17:5). 여기서 ‘영화’는 단순히 영광의 상태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승천까지 아우르는 구원의 완성 사건을 뜻한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 사건은 수치와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아들의 영광이 드러나는 절정의 순간이다. 아들이 십자가를 통해 순종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높이심으로 그 순종을 영화롭게 하신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절): 보전과 거룩의 요청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중심은 바로 “보전하사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라는 간구에 있다. 단순한 제자들의 안위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드러내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간구한다. 그는 제자들을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 부르며,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 있음을 드러낸다.
제자 공동체는 단순히 인간적 선택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존재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위험 속에서도 그와 함께 머물며 믿음으로 응답했다.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인 순종이라는 이중 구조가 드러난다. 이는 예정론적 색채를 띠면서도 동시에 성도의 결단과 순종을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고백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영광을 계시하는 상징이었다. 모세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을 알게 되었던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는 지적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건이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새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공동체가 바로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후예이다(계 2:17, 3:12).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 제자들은 이제 말씀을 지키는 존재, 곧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공동체로 세워졌다.
예수님 기도의 중심은 제자들의 하나 됨에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요 17:15). 오히려 그들이 세상 속에 남아 사명을 감당하되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이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씀과 진리로 구별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거룩은 단순히 세상과의 물리적 분리가 아니라, 말씀과 진리 안에서 세상과 구별됨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라고 기도한다. 거룩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위한 파송의 조건인 셈이다. 말씀의 진리 안에서 성별 되는 것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선교적 기반임을 밝히신다.
특히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노니”라고 선언하신다. 이때 사용된 “위하여”도 희생적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제자들의 거룩함이 가능해지는 근거가 예수님의 자기희생, 곧 십자가 사건에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의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거룩히 구별되듯,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구별하여 내어주셨다. 주님의 스스로 거룩하게 하심은 다시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한다. 이 자기 성별을 통해 제자들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요한복음의 성화론은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성별에 근거한 은혜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므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다. 이처럼 제자들도 보내신 분의 뜻을 순종하여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간다면, 진리로 인해 거룩하게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미래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20~26절): 연합과 선교적 증언
마지막 부분(20~26절)은 예수의 현존하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증언을 통해 미래에 믿게 될 성도들을 위한 중보적 기도이다. 이 기도는 교회의 본질을 연합 속에서 규정하며, 그 연합을 통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20절에서 예수님은 미래 성도들도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서 “믿는 사람들”이 현재 시제로 표현되었으나, 실상은 미래의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는 이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이는 단순히 공동체적 일치를 넘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는 ‘상호 내주(perichoresis)’를 근거로 한 존재론적 연합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은 단순한 협력이나 의지적 합치가 아니라 존재적 상호침투를 뜻한다(요 10:30). 따라서 성도들의 연합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며, 이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 가능하다(요 14:16-20; 15:26). 곧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성도들은 그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도들의 노력이나 의지적 성취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내주와 은혜에 의한 선물이다. 따라서 연합은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며, 동시에 수평적으로 성도들 간에 일치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참된 연합”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 연합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목적을 밝힌다. 곧 성도들의 하나 됨을 통해 세상이 두 가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임을 알게 하고, 둘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같이 성도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라는 단순한 인지적 지식이 아니라 존재적·경험적 인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교회의 연합은 곧 선교적 표지가 되며,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적 사건으로 작용한다.
22~23절에서 강조되는 “영광”의 부여는 이러한 연합의 근거를 설명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영광은 하나 됨과 온전함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특히 “온전함을 이루다”라는 표현은 수동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성도들이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아버지의 내주를 통해 수여되는 은혜임을 드러낸다. 하나 됨과 온전함은 같은 사건의 두 측면으로, 영광의 선물로서 성도 공동체 안에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모든 성도가 장차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보기를 소망한다. 이는 단순한 현세적 연합을 넘어,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는 궁극적 친교를 지향한다. 또한 26절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계시함으로써, 그 사랑이 성도들 안에 거하게 하려는 목적을 다시금 강조한다.
결국 요한복음 17:20-26은 교회의 본질을 ‘삼위일체적 연합’에 두며, 이 연합이 세상에 대한 계시와 선교의 표지가 됨을 천명한다. 교회의 연합은 인간적 조율의 산물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주에 근거한 신적 선물이다.
따라서 교회의 일치는 단순한 제도적 결속이나 윤리적 합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존재론적 연합에서 비롯되는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신앙은 단지 개인의 내적 결단이 아니라, 선포와 증언이라는 공동체적 사건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며, 그 기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적 기도가 자리한다. 이로써 요한은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삼위일체론적 근거를 동시에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