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여행의 즐거움

맛을 보아야 전한다
대중에게 알려진 맛집들은 공공 매체에 알려지기 전에 방문해서 맛을 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먼저다. 사람은 자신을 감동시킨 것을 쉽게 잊지 못하며 다른 이들과 자연스레 공유한다. 사실 교회가 지닌 복음이 듣는 이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인 것은 이를 전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말하기 전 먼저 자신에게 <정말 좋다!> 감탄할 정도로 감동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단기이든 장기이든 선교에 헌신할 사람이면 우선 자신이 복음을 맛보고 누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때 고국의 교회에 선교 열풍이 일자 많은 선교사 후보생이 국외에서 훈련을 받기 위한 나라를 찾던 중 이곳 뉴질랜드에 온 이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일부는 훈련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야만 했는데 이유는 다른 민족에게 가서 선교를 하기 전 이들에게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로 한 선교사 후보생이 훈련 학교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가정 폭력 때문이었다. 함께 훈련받았던 학교여서 학장(Academic Dean)에게 면담을 신청하여 행정 처분이 과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그때 그의 답이 필자를 놀라게 했는데 1) 귀국해야만 하는 훈련생은 먼저 그 자신이 복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2)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선교 훈련 학교가 아닌 정신과 병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얼마간 무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얼마 전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필자도 재미있게 보았다. 여러 인물 가운데 남자 주인공 관식을 괴롭히는 악역의 부상길은 ‘학~씨’라는 자기 감정 표현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나타낸다.

그런데 실제로 필자의 지인이 40대에 한국 모 교회에서 관리집사로서 살았는데 하필 그의 사택이 교역자의 사택과 붙어 있어 큰 소리를 내면 서로 다 들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은 옆집에서 부부싸움이 나면 그 소리가 다 들리는데 아내의 높은음 소리가 연속해서 들리면 이어 남편의 분노의 ‘학~씨’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필자에게 지인은 큰 한숨과 함께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 교역자의 설교에 감동을 받을 수 있었겠느냐고 전했다.

이런 부정적인 예들을 들어 마음이 아프지만 정말 선교에 참여하려는 이들은 우선 자신이 복음을 알고 맛보고 누리며 복음대로 살고 또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점을 양해하기 바란다. 선교는 복음을 맛본 자들이 그 감동을 감출 수 없어서 다른 이들과 심지어 저 멀리 있는 이들에게로 까지 가서 나누는 즐거운 일이다.

기도가 기대감을 만든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듯이 선교 여행에서 기도는 필수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나누고자 하는 것은 기도로 준비하는 과정 속에 기대감이 상승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성도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데(빌 2:13) 선교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가 깊어질수록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곧 복음을 갖고 만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감을 뜻하고 또 그들과의 만남에 대한 설렘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필자는 선교지에서 그동안 기도하던 이들을 만나면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게 없는,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아가페 사랑으로 채워진 눈과 마음으로 저들을 대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럴 때는 서로 확연히 다른 기후나 환경 차이, 언어 장벽 등 온갖 불편함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절감한다. 그러므로 최대한 기도로 기대감을 높인 후 선교 현장으로 나가길 권한다.

또한, 선교를 위한 기도는 어떤 이들에게는 씨앗과 같다. 필자는 섬기는 교회 분들에게 비록 자신이 지금 단기팀에 합류해서 나가지 않을지라도 기도에는 동참해 달라고 청한다. 왜냐하면 언젠가 때가 이르면 저들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 일고 현재 저들을 가로막고 있는 환경적 요소들이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한때 반대자요 박해자였던 이가 변하여 전하는 자로 사는 기적을 성경 안과 밖에서 본다. 나중 된 이가 먼저 되는 경우들(마19:30)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기도로 씨앗을 품으면 때를 따라 자라고 결실한다.

성경과 성령이 답이다
필자는 종말의 때를 지나는 성도로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말씀을 붙들고 산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선교는 연결되어 있다. 이 땅의 교회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복음 선교에 전력 질주해야 한다. 마지막 때가 깊어 갈수록 세상은 악해지고 혼탁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고통스런 종말의 때를 예언했고 필자는 우리 시대가 바로 그 같은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포스터 모던 이후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인본적 흐름이 대세가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성경도 하나님도 생각과 생활의 기준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안타깝고도 슬픈 현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뿐 아니라 교회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조차도 성경을 거의 읽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며 그분의 마음을 따라 살겠는가.

성경은 성령께서 기록하신 책이다(딤후 3:16-17, 벧후 1:21). 당연히 성령의 사람이 성경을 깨달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이 많아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바른길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믿는 자들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생긴다. 성경의 같은 본문을 갖고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있다.

필자는 섬기는 교회 가족에게 종말의 때에 성도가 붙들 것은 성경과 성령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성경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 성령께 늘 간구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선교 여행은 성령과의 동행이다
여행에 변수가 많으나 중요한 한 가지는 누구와 여행하느냐 에 따라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모든 돌봄을 받았다(막 3:14-15, 요 13:1).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인 우리들을 돌보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기쁨으로 수행하는 성도의 선교 여행에 성령께서 얼마나 즐겁게 동행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일상을 성령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이들이 선교 여행의 최상의 동반자 성령님과 함께 떠나는 길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