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은 지나온 삶을 통해 내게도 고백되어지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주님은 신실하게 우리 가정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우리 부부에게는 이제는 대학생이 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스스로를 챙길 나이가 된 두 딸이 있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용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생긴 행동 중 하나가 본인들이 원하는 옷을 직접 사 입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옷이 충분히 많이 있는 것 같은데 딸들은 그게 아니란다. 언제 한번 자기들이 원하는 옷을 마음대로 고른 적이 있었냐는 것이다. 아내는 화려하거나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교회에 가는 것을 늘 조심하였고, 아이들에게도 혹시라도 다른 성도들 자녀에게 자랑이 될까 봐 옷 하나에도 신경을 쓰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딸들 마음속에 이제는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직접 고르고,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목회자의 자녀이다 보니 이런 저런 조심스런 부분이 있다.
한 번은 주일날 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둘째가 “아빠, 왜 아무개 집사님이 오늘 안 보이시지?”하는 얘기를 들으며 아직 어린 둘째가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생각하지 싶었다. 아마 교회 식구들이 주일날 안 보이면 그 일로 노심초사하는 목회자 부모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이었으리라.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함이 교차하였다.
홀로 서기
크라이스트처치에 정착 후 3년 반이 지나 우리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하였다. 교회를 개척하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던 10주년 즈음하여 3주간 교회의 허락을 받고 조용한 곳에 가서 나 자신과 지나온 목회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그 동안 고민하던 것을 결행하게 되었다.
개척하여 10년 동안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결정을 하면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족들이었다. 당장 가장으로 생활의 필요를 채워야 하고, 목회자로서 정체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 등 여러 가지 염려와 두려움이 있었지만 기도 가운데 결정하고 가족들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였다.
당시 큰 애는 한참 예민한 사춘기 Year 9을 지나고 있었고, 둘째는 아직 어린 Primary 학생이었다. 그 때 보았던 슬픔이 가득한 큰 아이의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8년이 지난 지금이야 이 모든 것을 추억으로 뒤돌아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도전이자 쉽지 않은 결정이고 시간들이었다.
당시 경험을 통해 가족 모두가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더 견고한 신앙인이 되었음을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지금도 마음 한 켠이 시려온다.
목사의 딸
한국 최초로 성경 주석 전권을 완성한 성경신학자요, 성경 밖에 몰랐다는 박윤선 목사님의 딸인 박혜란목사가 쓴 [목사의 딸]이란 책이 작년에 출간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이 박윤선목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학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회고하는 박윤선목사님은 모두가 흠모하는 너무나 훌륭하신 분이시다. 그 분이 설교할 때면 정말 피를 토해 내는 열정으로 말씀을 쏟아 내곤 하셨다. 박목사님은 참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고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따뜻함과 사랑으로 모두를 품으려던 그런 삶이었다고 그분을 기억하는 분들은 한결같이 추억한다.
그런데 딸이 책에서 공개한 아버지 박윤선의 삶과 신앙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딸이 바라 본 박윤선목사는 아내에게 매정했고, 자녀들에게도 전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여 주지 않았으며, 오직 연구하고 책을 쓰는 일과 교회 일에만 매달렸던 분이었다는 것이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에게 영적인 일이란 곧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설교하는 일, 주석을 쓰는 일이었다. 그에게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육신의 일에 불과하였으며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율법주의적 신앙으로 일관했다고 딸은 느꼈던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박혜란목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지만 늘 하나님께 범죄를 저지를까 봐 부들부들 떨었다고 책에서 고백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다른 자녀들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는 그리 아니하였을지라도 딸은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딸이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책에 쓸 수 있느냐고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목사님들, 장로님들 자녀들 중에는 고 박윤선목사 가정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가족이 가장 소중한 동역자이다
목회자들에게 누구로부터 영적 도움을 가장 크게 받는가를 물었더니 규모가 적은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평상시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 대상이 배우자/가족(52.2%)이라고 한다. 그 다음이 선후배/친구 목회자(23.8%), 신학교 은사(17.6%) 순서이다.
목회자만큼 배우자와 가족이 가장의 직무에 많이 연관되어 있는 직업도 드물 것이다. 사모들은 목회자와 함께 교회와도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녀들은 말 그대로 교회 안에서 자라고 있다. 목회자의 사역과 가족 간의 이러한 상호 연관성은 커다란 혜택인 동시에 고충이기도 하다.
목회자 가족들은 유리 상자 속의 사람들처럼 관찰의 대상이 되며, 때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목회자의 가족은 목회사역의 일부나 다름이 없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4,5절에서 목회자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밝혔다. 목회자가 자신의 가족을 잘 돌보지 못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돌볼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아내 대부분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친구를 교회 안에서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교인들과의 모임은 있지만 결국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 목사의 아들 바나바스 파이퍼 (칼럼니스트)는 유명 목사의 아들로 살아오면서 느낀 애환을 담아 The Pastor’s Kid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바나바스 파이퍼는“교인들은 목사의 자녀가 신앙심이 좋고, 교회를 사랑하며, 가족과의 관계가 좋을 거라 생각 하기 때문에 늘 가면을 써야 했다” 며“목사 자녀도 신앙을 고민할 수 있고, 때론 못된 짓도 하며, 부모 에게 반항하면서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이 성장한다”고 말한다.
목회자 자녀가 어릴수록 본인의 정체성은 목회자라는 부모의 신분, 주변 시선, 당위적 규범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목사와 사모, 목사 자녀도 사람이다. 그들 자체가 특별한 존재이거나 위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소명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의 주권이 목회자와 그 가족을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길로 부르신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목사와 사모는 영적 지도자로서 선택되고 소명 받음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도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