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학과 목회 철학에 큰 영향을 준 교수님이 한 분 계신다. 해외에서 영어로 처음 신학 공부를 한 나에게 지속적으로 뉴질랜드를 방문하며 체계적으로 조직신학을 가르쳐 주시는 교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 교수님이 방문하실 때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 신학적, 목회적 의문들을 준비하여 질문하고 그 교수님으로부터 시원한 대답들을 얻어왔다.
시간이 지나 그 교수님이 종말론 강의를 위해 마지막으로 뉴질랜드를 방문하시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그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질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교수님과 단둘이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교수님! 하루 종일 강의로 피곤하시겠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꼭 질문하고 싶습니다” “아, 네 물론이지요. 질문하세요.” 교수님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내 질문을 기다려 주셨다. “너무 폭넓은 질문 같긴 한데요…. 교수님은 목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내 마지막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그 심오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교수님은 다시 포크를 잡으시며 너무 쉬운 질문이라는 듯이 잠시 웃으시며 간단하게 대답해 주셨다.“아~ 목회는 함께 사는 거예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아마 내 속에서는 좀 더 심오한 신학적 해석이 담긴 긴 답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나의 이 심오한 질문에 이렇게 간단한 답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질문했다.
“교수님이 보실 때 신학적으로 목회는 무엇을 하는 거라 생각하세요?”교수님도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응시하며 천천히 대답하셨다.“그러게요 결국 목회는 함께 사는 거더라구요.” “……….”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 나는 그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 버리고 아쉬움만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아니 세상에 목회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거라면 누구나 다 하겠네… 혹시 너무 피곤하셔서 대충 대답해 주셨나?’
사실 어떤 사람은 목회를 더 심각하게 말한다. 목회란?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사람들을 세상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이 성도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목자가 되는 막중한 일이라고 말한다. 맞다! 그만큼 책임이 막중하고 영광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목회는 그렇게 심각한 것인 만큼 또 그 만큼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오래전에 어떤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 장로님께서 교회에 청년들이 찾아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니까 축하한다고 정말 이 시대에 너희들 같은 영적 지도자가 꼭 필요하다고 격려를 하셨는데 막상 자신의 아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니까 세상에 목회가 얼마나 고생하는 건데 그런 걸 하려고 하느냐며 차라리 그럴 거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만큼 목회가 힘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목회는 종합예술이다. 목회를 잘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팔방미인이 돼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뛰어나야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행정력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설교학 세미나, 리더십 세미나, 제자훈련 세미나, 전도훈련 세미나 등 각종 다양한 목회의 기술들을 익히고 그리고 거기서 배운 것들을 열심히 교회에 적용해왔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면 할수록 교회공동체는 더 많은 문제가 생기고 내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설교도 열심히 준비하고 제자훈련에 세미나에 성경 대학까지 진행하고 선교에도 열심을 내고 또 그 작은 개척교회에 엄청난 프로그램들을 적용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도들은 서로가 멀어지고 또 목회자인 나와도 점점 멀어져 갔다.
결국 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교수님의 짧은 대답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 목회요? 목회는 함께 사는 거예요”어쩌면 제일 중요한 함께 사는 것을 잘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목회에 대한 고민으로 20년간 정들었던 오클랜드를 떠나는 결정을 내렸다. 무겁고 오래된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다 정리했다. 그리고 커다란 이삿짐 트럭을 빌려 남은 짐들을 가득 싣고 아내를 옆에 태우고 11시간을 운전하여 웰링턴으로 내려왔다.
나는 왜 이곳에 내려왔을까? 그리고 무엇을 다시 해보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 교수님에게 들은 대답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실제로 목회의 핵심이 함께 사는 것이라면 내 삶의 터전을 옮기고 새롭게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클랜드로 가려고 할 때 나는 그곳을 떠나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 어쩌면 이곳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들과 함께 살겠다는 나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으로 비춰 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점점 그 교수님의 답을 깨달아 간다. 목회에 가장 힘든 것이 함께 사는 일이지만 반면 가장 중요한 것이 함께 사는 일이다. 왜냐하면 함께 사는 일은 나의 연약함이 다 드러나고 그들의 연약함도 결국 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 연약함들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속에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길 뿐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는 결국 함께 살아가는 것이 맞다.
2000년 전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최초로 이 땅의 목회를 시작하셨다. 처음에 성도가 된 사람들은 공교롭게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보라”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거처를 공개하시고 그들과 거기서 함께 거하심으로 목회를 시작하셨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일 처음 보여주신 목회의 모습이다.
결국 나는 아직도 목회 초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그대로 품어주는 것이 힘들고 또 내 연약함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를 싫어한다. 그래도 이제는 하루하루 배우며 산다.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결코 교회가 함께 사는 공동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또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도 함께 사는 것이 목회임을 배운다. 나에게 목회란 결국 주님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