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마음으로 여는 행복

한인 목회를 시작한지 2년째 되던 해였다. 하루는 알고 지내던 집사님 한 분이 아픈 환자가 있다며, 함께 심방을 가자고 권하셨다. 남편이 폐암에 걸렸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라고 했다.

당시 교회 교역자들과 함께 첫 심방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은 심각했다. 폐암4기, 의학적으로는 회생 가능성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목사님 심방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 부부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두 분은 재혼 한지 2년이 되었다고 했다. 부인은 유망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남편 되는 분은 미국 시민권자였다.

두 사람이 사업차 만나다 결혼하게 되었고, 두분 다 중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예쁜 딸을 보게 되는 축복까지 받았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삶에 청천 벽력 같은 폐암 소식이 날아들었다. 두 분다 힘겨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싶다는 열망만큼, 그들의 슬픔은 더욱 깊었다.

한 번의 심방이 매일 예배로 이어졌다. 첫째 주가 지날 때 두 분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둘째 주가 지나자 아픈 몸을 이끌고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교우들 모두가 그분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병세가 악화되어 그분은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죽음을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님을 대신해 한가지 약속을 해 주세요
호스피스 병원에서 예배 드릴 때, 가족 들과 이별을 준비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란 소망을 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남편은 내 손을 붙잡으며,“하나님을 대신해 한가지 약속을 해 주시겠습니까?” 라는 부탁을 했다.“목사님,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제 갓 돌이 지난 우리 막내를 지켜 줄 것이라고 약속해 주세요. 하나님이 우리 딸을 평생 떠나지 않으며, 내가 돌봐 주어야 할 모든 부분을 대신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세요!”

산소 호흡기를 의지해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이 부탁을 하려고 호흡기를 떼고 던진 부탁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한 돌이 갓 지난 딸 아이의 아빠는 창조주의 약속을 듣고 싶어했다. 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을 대신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은 형제님이 사랑하는 것보다 막내를 더 사랑하세요. 제가 아는 하나님은 형제님의 따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세요.” 우리는 함께 막내를 하나님에게 부탁하는 기도를 했다.

이틀 뒤, 그는 자신의 힘겨웠던 삶을 모두 정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 그분의 움푹 패인 눈에서 흐르던 그 눈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뉴질랜드에서 이민자 1세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해보지 않았던 육체노동을 하며, 영어라는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한없이 작아지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하다.

자녀들을 위해서 이민을 결심했는데, 성인이 되어가는 자녀들은 그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때 마다 나의 수고를 알아 달라고 고함치는 치사함과 옹졸함이 싫지만, 그 말을 또 내뱉는다. 난 누구 인가? 무엇 때문에 이 낯선 땅에서 노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사람에겐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다. 물리적 시간이란 과학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이다.

심리적 시간이란 사람이 느끼고 체감하는 시간으로 사람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1시간의 느낌이 다른 사람들에겐 10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는 것은, 심리적 시간이 이전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뉴 밀레니엄 공포가 엄습하던 해,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단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뉴질랜드는 우리 가족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보던 그 아름다움 경관이 오클랜드에서 네이피어까지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이렇게 벅찬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형형색색의 하늘과 석양은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찌개를 다시 데워서 먹는 것처럼 어느 순간 너무나 당연한 하루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아도 마음으로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심리적 시간이 고갈된 까닭이다.

2년전 어머님이 편찮다고 하셔서 한국을 10년만에 방문했다. 아프셔서 찾아갔는데, 찾아온 나를 걱정하셨다. 그렇게 병상에 계신 어머니를 뵌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작년에 장모님이 소천하셨다. 큰 딸이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쁜 숨을 14시간 동안이나 참아 내셨다. 우리가 도착하고 난 뒤, 20분 만에 눈물을 흘리시며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연이어 두 번 상주가 되고 나니, 많은 것들이 달라져 보였다.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자녀들을 향하던 어머니의 마음이 눈에 선하다.

어머님과 장모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동안 내가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메말랐던 심리적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채워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육신적으로는 두 분을 떠나 보냈지만, 마음에는 어머니가 주신 사랑과 기도가 담겨 있었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딸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간 그 아버지가 병상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이제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행복이란
행복을 보고, 만지려고 하면 점점 더 멀어진다. 행복을 채우려 하니 행복과는 점점 더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환경과 여유를 이미 누리고 있지만, 각박해진 마음은 그것을 외면하게 만든다.

죽음과 이별은 슬프지만, 이기적인 욕심과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해준다. 갓 한 돌이 지난 딸 아이를 남기고 떠난 그 형제의 기도는 그의 마지막을 풍요로운 삶으로 바꾸었다. 그는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기도는 살아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딸아이와 하나님을 지금도 이어주고 있다.

일상에서 드리는 기도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의 기도처럼 될 수 있다면, 잃어버렸던 행복과 감사가 넘칠 것이다.

어머님이 병상에서 남긴 기도와 사랑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놓치며 살아왔는지 보게 했다. 매일 아침마다 마주하는 하루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어느새 뉴질랜드의 푸른 하늘이 마음에 쏟아진다. 저 하늘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을 담아낼 화폭으로 보인다. 무엇을 그릴까? 어떤 색을 입힐까? 오늘은 누구에게 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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