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10월 셋째 주 찬송/10월 넷째 주 찬송

10월 셋째 주 찬송/585장(통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의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성(城)교회 건물 정문에‘95개조 논제’를 못 박은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이거든요.

루터는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wen)에서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만스펠트의 라틴초급학교를 나와 형제단학교(Frate harren), 아이제나하의 라틴학교를 거쳐 유럽 최고의 학부인 엘보트 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한 후 엘보트의 어거스틴 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24세에 신부가 되었고, 1510년 비텐베르그 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하였는데, 당시는 로마 교황인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립 모금을 위해 속죄권(贖罪券, ndulgence taxes)을 판매하는 등 교회부패에 절정에 이르던 때였지요.

루터는 성경말씀에 정면 배치되는 가톨릭교회의 정책을 보다 못해 드디어 정치적, 신학적 공격을 최고 권력자인 교황에게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가톨릭에선 우리 개신교도를‘항의자’란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루터의 개혁사상을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루터는 ‘만인사제직’의 신학으로 교인은 누구나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성경은 성직자와 특권층만이 볼 수 있었고, 어려운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은 성직자들이 읽어주는 것만을 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찬송 역시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중들은 청중에 불과 했지요. 루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으로 응답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루터는 신구약 성경을 13년이나 걸려 독일어로 번역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라틴어로 예배드리는 ‘라틴어미사’는 지식층의 사람들을 위해선 그대로 존속시킨 채, 서민층과 농민들을 위해서 그들의 특수성에 맞도록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독일어 미사에서 성가대와 회중이 음악을 적절히 나누어 부르게 하였습니다.

루터는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 회중들이 노래하도록 직접 자국어(自國語)인 독일어 회중찬송들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코랄’(Chorale)입니다. 그는 37편의 코랄을 만들었는데, 그 중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비롯한 9편은 창작한 찬송이고, 나머지는 예부터 불려 내려오는 라틴어자료를 번역하거나, 개혁 이전의 찬송을 수정하거나 시편 등 성경의 여러 부분을 인용하여 만든 것들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종교개혁의 성공을 두고 하나님의 섭리에 다시금 감동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때가 차매”(갈라디아서 4;4)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통치와 더불어 헬레니즘 문화와 언어의 통일, 로마가 뚫어놓은 길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준비된 바로 그 ‘때’라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때가 차매’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성경이 잘 번역되고 찬송이 작곡되어도 인쇄되어 반포되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인쇄술이 발명되었기에 성경을 찍어내는 대로 회중들이 볼 수 있었고, 찬송을 찍어 내는 대로 회중들이 부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복음찬송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터는 심오한 성경의 교훈을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그리고 힘 있게 찬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평민들의 언어라 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침투력 있게 신앙고백 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죠.

루터가 45세 되던 1529년 여름, 보름스(Worms)의 재판정에 나가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시편 46편 내용을 기초해 이 찬송가를 지어 그의 동료들과 함께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땅의 마귀가 저 보름스 재판정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들끓더라도 진리로 이길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10월 넷째 주 찬송/새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코랄에는 눈 모양의 페르마타(fermata)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페르마타란 ‘정지’의 뜻을 가졌기에 그 곳에서 노래를 정지하고 숨을 쉬라는 것입니다. 찬송가에서 페르마타가 많은 곡은 십중팔구 코랄로 보면 됩니다.

찬송 시에 교회 밖의 노래, 즉 세속 노래 선율을 사용하여 코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든 코랄이 16C에 174편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곡명 PASSION CHORALE인 곡조는 16C 유명한 작곡가인 하슬러(Hans Leo Hassler, 1564-1612)의 연가인‘내 마음은 (그 소녀 때문에)괴로워한다’(Mein G’müt ist verwirret)에서 나온 선율인데, 이 선율에다 클레아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 1091-1153)의 시에 맞춘 것입니다.

명상의 생활을 대단히 중시한 신비주의자 베르나르드가 라틴어로 쓴 장시‘Rhythmica Oratio’중의 한 부분을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6-1676)가 독일어로 번역하여 8행 10절로 1656년 크뤼겔의‘Praxis Pietatis Melica’에 발표했습니다.

이 독일어 번역 시는 라틴어 원문보다 더 열열하고 성서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드의 원래의 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는 몸통 전체를 다리, 무릎, 손, 옆구리, 가슴, 심장, 얼굴 등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했는데, 게르하르트는 얼굴 부분만을 떼어 이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게르하르트는‘내 영혼아 곧 깨어’(통18장)를 지은 루터 교 목사님이지요. 작곡자 하슬러는 독일의 누렌베르그(Nurenberg) 태생으로 르네상스 말기에서 바로크 초기에 걸쳐 활약하였던 당시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독일적인 깊은 정서와 이탈리아적인 우아함과 활발함, 이탈리아 풍의 음색 효과에의 풍부함을 융합시켜 많은 훌륭한 종교곡과 다성(多聲)작품을 남겼는데요, 그의 작품으로는 많은 미사와 모테트 외에 ‘새 독일 가곡집’등이 있고, 이 찬송은 1601년 5성부 곡으로 작곡한 ‘새 독일 가곡의 기쁨의 마당’(Lustgarten Neuer Teutscher Gesang)에 발표된 곡입니다.

사랑의 노래로 작곡된 이 세속적인 멜로디가 개혁자의 손에 의해 거듭나,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얼굴을 노래한 성스런 노래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핫슬러는 시편 96편을 노래한 ‘오 찬송 드리세’(O Sing unto the Lord)의 작곡자로 성가대원들에겐 낯익은 작곡가이지요.

이 찬송의 곡명이 PASSION CHORALE로 붙여진 것은 바흐(J.S.Bach)가 수난 오라토리오인‘마태수난곡’에서 이 코랄곡조를 사용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Weihnachts-Oratorium)등 그가 쓴 여러 교회작품에도 종종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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