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목사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늘 반갑게 인사해주지만 절대로 편안하고 싶은 자리에는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목사라고 소개될 때면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미소로 환영(?) 받는 것에 많이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부분을 괜히 건드렸다가 미운 털이 박혀 온갖 허물이 들추어지기도 하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다른 인생 참견하고 다니는 오지랖 넓은 위선자로 좁은 이민사회에서 장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돈을 밝히는 사람, 탐욕을 감추는 사람, 설교로 사람 이용하는 사람, 늘 말로 상처 주는 사람 등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연 없는 무덤이 하나도 없지만 저는 제가 겪는 괴로움의 원인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지목합니다. 아마 그 분도 익숙하실 것입니다.
물론 제가 겪는 고통의 99%는 제 성질머리로 인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뒤집어 씌우기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까지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아 늘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합니다.
제가 저의 고난의 원인으로 하나님을 지목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때문입니다. 물론 더 많은 이유에서 그 성경을 들고 있는 ‘저 자신’의 악함과 약함이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게 만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미워하고 대적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좋은 에덴 동산에서도 서로 좋게 좋게 지내면 될 것을 하나님은 굳이“이건 손대지 말라”고 꼰대 같이 한 마디 하시는 바람에 오늘날 이 사단이 난 것 아닙니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전매특허인데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새롭게 기분이 나쁩니다. 그 누가 어떤 고급스러운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아무리 조심스럽게 사랑으로 말해 주어도 “하지 말라”는 말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무시당한 것 같고, 간섭 받는 것 같은 그 느낌은 아무리 고상하게 감춰보려 해도 입 꼬리가 떨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지 말라는 저 말 보다 더 짜증나는 말씀을 보유하고 계시는데 바로 하기 싫은데 “하라”는 것입니다. 내 의사나 기분과 상관없이 해라, 하지 마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내 밥줄을 쥐고 있는 직장과 아내 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 존재의 생사여부도 아직 인정해 드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그 분이 무슨 요구가 이리도 많다는 말입니까?
내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요구는 엄청나게 많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그리 탐탁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유명세를 타는 분이라 성질 꾹 누르고 있는 중인데 눈치 없이 하나님의 말씀 운운하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놈이 하나 앞에서 설치니 방향을 몰라 헤매던 모든 활들이 드디어 살을 날릴 ‘목사’라는 과녁을 찾고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되어 생명의 밥을 맛나게 지으면 굶주린 영혼들이 배고프다고 줄을 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왠걸요? 목회의 현장에서 배고프다며 외치는 소리에 귀가 다 아프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는 불평 불만의 소리에 교회 천장도 내려앉을 것 같은데 아무도 밥을 먹겠다고 나오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민 생활이 고달프다고 우는 소리는 데시벨이 높아만 가는데, 기도하는 소리는 점점 작아져만 갑니다. 말씀에 고프다고 울부짖는데 정작 젖병이라도 입에 물릴라치면 젖병이 무거워서 못 먹겠다, 젖병을 들어주겠다 하면 아무리 빨아도 안 나온다, 내가 빨아서라도 물려주겠다고 하면 다 알면서 선수끼리 왜 이러냐고 째려봅니다.
세상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싫어합니다. 적어도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단지 무관심한 것이지만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아 물론 드러내 놓고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들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표어 맨 위 자리에 링크합니다. 설교자도 듣는 자도 말씀 말씀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것이며, 말씀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말씀이 바로 하나님 이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나는 비록 사정이 있어 말씀 안 보지만 말씀도 안 보는 네가 사람이냐고 다그치는 우리가 아닙니까?
아마 성도라면 말씀을 싫어한다기 보다는 그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하려고 할 때에 겪어야 할 진저리 쳐지는 고통을 힘들어 하고 불편해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다른 성도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사역자에게 이용당했다고 느낄 때, 배우자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때, 모처럼 회생할 수 있는 세상적 기회가 눈 앞에 다가왔을 때…내 바램과 감정에 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재앙이며 큰 상실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식과 명령 앞에서 분노했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며, 모멸감에 나를 차라리 죽여 주시는 게 어떻겠냐고 부탁 드렸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같은 하나님의 센스 없음에 피눈물을 흘리던 믿음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울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저는 바로 이 불편한 말씀을 자꾸 하시는 분에 대하여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안 믿으실 줄 알지만 그래도 목사니까 성경 한 구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10:3).” 사실 소개해 드리는 저도 좀 민망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 모든 것들이 “너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덥석 받아들여지고 믿어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지요.
이건 어떻습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1:1).” 이 말씀들이 혹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어지는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요한복음17: 14)”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한복음15: 18).”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일서3: 13).” 어떠십니까? 이것 마져도 기쁘게 받아들여지고 믿어 지신다면 구원받았음의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덤 밖 예수님께서“나사로야 나아오라”외치셨을 때 그는 들을 수도 반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생명을 준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들에게 “일어나라”고 외쳤을 때에도 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말씀이 뼈들에 생명을 준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들으려고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찾아가 말씀을 던져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변이 없는 한 목사인 저는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은근히 따돌림을 받으며 외롭게 살 것이 아마 확실할 것 같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제가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생각보다 저와 같은 길을 기쁘게 가고 있는 분들이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마피아 게임처럼 살짝 눈을 뜨고 손을 들어 서로를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 보입니다. 아주 잘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에겐 이 고백이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