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를 마치고 서둘러 집에 들어와 챙겨둔 가방을 끌고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탄다. 공항가는 길. 크라이스트처치 가는 길이다. 밤에 일하는 남편이랑 쉬는 날도 달라서 여간 해선 시간 맞추기 어려운데, 그래서 누구 집에서 초대하면 혼자 가곤 했는데…
첫째 날, 크라이스트처치의 가을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오래 살고 계신 남편 선배가 이사했다고 놀러 오라고 초대해줘서 큰맘 먹고 휴가를 내서 2박 3일간 다녀오기로 했다.
진작에 끊어놓은 저가항공사 입구에서 이번 여행을 함께할 후배를 만나 셋이서 비행기에 오르니 드디어 실감. 와우! 남섬 간다.
20년 넘게 오클랜드에 살면서 국내선 비행기 타고 가는 여행은 이제 두 번째. 한 시간 넘어 창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예쁜 불빛들이 섬을 이루고 있는 작고 아늑한 도시에 도착을 할 때부터 우리는 일상을 잊고 낯선 곳에서 보지 못하던 걸 보고 설레고 감탄하고 즐거워하고 새삼 감사하고 순간을 누리는 여행을 하게 된다.
공항마중에서부터 재워주고 먹여주고 운전해주고 그렇게 완벽한 여행 스폰서가 되어준 선배가 꼼꼼하게 잡아놓은 일정에 따라 우선 시내 유명한 중국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게스트하우스 못지않은 숙소에 짐을 푼다.
넓은 집 3층 테라스 딸린 방에 배정을 받아(선배는사업도 그렇게 꼼꼼하고 디테일하게 하는 모양이다.) 옷가지를 걸고 와이파이 주소를 입력하고. 몇 개월 만에 만난 터라 아이들이며 직장 사업 이야기에 섬기는 교회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이야기까지 나누고 나니 늦은 밤이다.
둘 째날, 아카로아 가는 길
호텔 조식 같은 아침식사 잘 먹고 10시쯤 우리는 아카로아로 떠난다. 남섬 내려가기 전에 가보고 싶은 데를 말하라는 선배께 미리 신청해놓은 곳인데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분들에게는 익숙한 장소인 듯 하다.
거리는 약 80 km 남동쪽 방향이고 프랑스인들이 정착한 곳이라 지금도 프랑스 스러운 뱅크스반도 끝 작은 바닷가 마을이라는 사전 공부를 토대로 막연하게 ‘아기자기하고 예쁜 곳이겠지’ 하고 출발했다.
하지만 길은 점점 산길로 접어들고 오르막에 꼬불꼬불 제법 높이 올라왔을 때 전망 포인트가 나타나 차에서 내려서 내려다 본 정경은 와! 뭐라 말 할 수 없이 그저 와!
가파르게 깎인 산등성이 끝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가 해안선을 U자로 만들어 놓은 그 모습은 정말 기가 막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찍은걸 다 삭제 하고 싶을 만큼 내가 보고 있는 게 압도적이다. 저 아래 저 바다에 가까이 가고 싶어 다시 차를 타고 마저 달린다.
산을 넘어 바닷가 길을 따라 아카로아에 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근사하다. 아카로아는 바닷가를 끼고 식당이며 호텔이며 기념품 가게들이 있고 작은 크루즈가 출항 하기도 하는 항구이기도 하다.
스쿠버다이빙을 하거나 돌고래를 보기도 할 수 있는 크루즈도 있고 박물관이나 등대 같은 볼거리도 있다. 우리는 그런데를 가진 않았지만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다.
현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아카로아 Fish & Chips 가게에서 각종 해산물 튀김과 칩스 샐러드 콜라로 든든히 먹고 산책하다가 어느 카페 야외테이블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도 마시고‘이보다 좋을 수 없다’라고 할만한 하루를 보냈다.
오래 전부터 내 SNS에 써놓는 상태메세지는 “마음에 품은 소원 잊지 않기”이다.
젊었을 때 이민 와서 아이들 키우며 시어머니 모시고, 이 일 저 일 하면서 정말 빠듯하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걸 다 말하고 살지도 못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내가 얼마나 낯선 곳에 가보고 싶어하는지, 얼마나 견디던 일상을 떠나고 싶어하는지, 아니 그것조차 모르고 나이 드는 것이 너무나 저리게 애닯고 아쉬어서 그렇게 적어놓았는데 이날은 소원을 이룬 그런 하루였다.
해지는 게 예쁘다는 아카로아에 꼭 다시 오고 싶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어느 유럽의 도시도 이만큼 예쁠까? 소원을 마음에 품고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간다.
늦기 전에 바베큐 해야 한다고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도 뭔가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선배의 열심으로 캐시미어 지역에 있는 전망대도 들리고 주택가에서 내려다보이는 시티 뷰도 보여주셨다.
오클랜드 마운트 이든 정상에서 시내를 보는 거랑 비슷했지만 어스름한 저녁시간에 집집마다 거리마다 불이 켜지는 때라 위로는 붉은빛이 도는 회색하늘에 비행기가 쌩하고 지나갔는지 길고 하얀 구름 줄이 그어져있고 아래로는 어젯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불빛의 섬 같은 도시가 보이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바람마저 불어주는 서늘하지만 따뜻한 풍경이었다.
셋 째날, 모나베일과 헤글리 공원
크라이스트처치 하면 헤글리 공원과 보타닉가든이지 라고 할 만큼 잘 알려진 도심공원인데 이번엔 선배의 추천으로 모나베일(Mona Vale)을 시작으로 마지막날 일정을 잡았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스스로 City of Garden이라고 소개하고 또 그렇게 알려져 있는 도시답게 잘 꾸며진 잘 가꾸어진 커다란 정원 같은 도시이다.
이름에 걸맞게 헤글리공원의 규모나 구성이나 뭐 빠질게 없는 공원인데, 공원 옆이지만 붙어있지는 않은 덜 알려진 작은 공원 모나베일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오클랜드보다 약 4~5도 정도 낮은 기온에 비가 적고 일조량이 많아서 그런지 깊은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해주는 단풍은 정말 환상적이다. 모나베일은 처음이라 비교할 수 없지만 가을이 제일 예쁘지 않을까 싶다.
시내에서 아직 지진의 흔적이 있는 건물들도 보았지만 오히려 재건축된 상가들이나 건물들은 깨끗하고 모던하게 보여서 세련되어 보이고 활기 있어 보인다. 에이본 강에서 즐기는 베니스에서 볼 법한 배, 케이블카, 시내투어 해주는 트램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탈 것들도 있고 Family pass 도 있으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이라면 한번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린 헤글리공원으로 마지막 일정을 하러 이동한다. 따뜻한 날은 아니지만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주말도 아닌데 공원은 사람이 참 많다. 생각해보니 아이들 방학이라 그런 모양이다.
모나베일을 다녀온 후라 감동은 좀 덜했지만 에이본강을 따라 좁고 긴 배를 타고 가는 여행객도 보고 어디에 맞춰서 찍어도 예쁜 사진이 되는 공원을 남편 손 잡고 걸으면서 꿈같은 2박 3일간의 여행을 마무리한다.
집에 들어가 짐을 챙겨 들고 공항으로 가는 중에“집앞에 벚꽃 필 때 또 놀러 와”하시는 선배님. 다음엔 봄에 가야지~
가을에 만나는 시
어머니의 가을이 오면
이해산
어머니가 홀로 떠난
가을날이 무심히 오면
물가에 선 나무들은
노오란 옷을 입네.
어머니의 가을날은
눈꽃으로 다가오고
바람에 실린 눈이
산허리까지 덮네.
어머니 없는 가을날을
맞고 보내면서도
살가운 그리움은
잠들 줄을 모르네.
어머니가 눈으로 온 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상처난 영혼을 감네.
어머니의 가을이 오면
눈이 시려워도
있는 그대로
할퀴는 세상을 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