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는 야곱이었다. 야곱의 딸이 우리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니기에 학교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히브리어를 잘 하지 못했고, 그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 의사소통에 알쏭달쏭한 면이 참 많았지만, 그의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식사초대에 장례식 초?
한번은 야곱 가족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게 되었다. 식탁에 초를 하나 켜 놓으면 좋을 것 같아 모양도 괜찮고 가격도 저렴한, 일주간 켜 놓을 수 있는 초를 하나 사다 놓았다.
야곱 가족이 도착하고 식사를 시작하려 할 때, 식탁 옆에 놓인 초를 야곱이 발견하였다. 식사를 바쁘게 준비하느라 깜빡 있고 켜 놓지 않고 식탁 옆에 두었던 초를 그가 본 것이다.
야곱이 왜 이 초를 샀느냐고 묻기에, 오늘 저녁 식탁 분위기를 좀 더 근사하게 만들기 위하여 샀는데 식사 준비하느라 깜빡 잊었다고 말하자, 야곱이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웃기 시작하였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 잠시 당황해 하자 야곱이 바로 설명을 해 주었다. 그것은 장례식을 위하여 일주일간 피워 놓는 초라라는 것을. 깜빡 잊고 켜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타문화권에서 살게 되면 새로운 언어와 생소한 문화를 배우는데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구한다.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잘 하지 못해도 영어를 할 줄 알면 일상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문제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문화였다. 얼마나 많은 실수와 인내가 필요했던지.
힘겨웠던 유대인과의 대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스라엘에 살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대화 태도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적지 않은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인지, 유대인들은 자기 주장이 대단히 강하고 대화 자체도 굉장히 논쟁적이다. 한 두 마디가 오가면 벌써 말하는 톤이 올라가고 다양한 제스처를 사용하며 마치 싸우는 것처럼 대화하기 시작한다.
외국인이 보면 영락없이 싸우는 모습이지만, 실상은 일상적인 대화인 경우가 많다.
예의를 강조하는 문화에서 자란 한국인에게 이런 대화는 참 힘겹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 상대방의 주장에 동조하며 분위기를 맞추어 가는 대화에 익숙한 나에게 그들의 직설적이고 강한 의사표현은 알게 모르게 나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내적인 상처를 만들기도 하였다.
놀라운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나도 그들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한 두 마디가 오가고 나면 이제 나도 현지인에게 지지 않으려 목소리를 높인다. 온갖 제스처를 써가면서 나의 의견이 관철되도록 강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오면 왠지 모를 허탈감이 찾아 온다는 것이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참 낮설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만 이건 아니지 싶은 때가 종종 있었다.
더 어려웠던 것은 현지 학교에서 교육받는 우리 아이들이 유대인과 똑 같은 모습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부름을 시키는 아빠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일을 지금 할 수 없다 직설적으로 대답할 때 이것이 대화인지 반항인지 쉽게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내 차례가 오지 않는 줄서기
지금은 달라졌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은행을 방문하면 항상 줄을 서야 했다. 은행을 처음 방문한 날, 앞에 5사람이 서있는 것을 보고 기다릴 만한 시간이 되겠다 싶어 줄을 섰는데, 앞에 선 5사람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내 앞에 5사람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네 앞에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일을 보고 돌아와 그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멘붕’이 왔다. 잘 되지도 않는 히브리어로 항의해 보았지만 시큰둥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 가서 하소연 하겠는가? 그들의 문화가 그렇다는데.
내가 살았던 하이파는 일차선으로 된 도로들이 많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길을 가다 친구를 만나면 차를 세워 놓고 친구와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성격 급한 유대인들은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며 비키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앞에 차를 세운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기다리라는 것을 손으로 표시하기만 한다.
한 동안 큰 소란이 벌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주먹다짐을 하며 싸우지는 않는다. 매 순간이 싸움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지만, 4년 동안 이스라엘 살면서 폭력을 행사하며 싸우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유대인의 겉과 속
유대인들은 자신을 ‘짜바르’(선인장)라 말하곤 한다. 겉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많지만 속은 부드럽다는 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날카로운 가시를 두르고 살아가지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인간이라는 것이다. 정에 그립고, 사랑에 그리운 인간.
유대인 청년 한 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기독교와 천주교에 의해 수 없이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교육을 받는 유대인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간증을 했다.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 갔지만, 정작 그들을 진심으로 받아 주었던 사람들은 기독교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민자로 이 땅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하며, 이질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때로는 힘겹기도 하다. 힘겨운 삶이 지속 되면 알게 모르게 우리도 외부로 가시를 만든다. 생존 본능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시가 때론 가까이 있는 사람을 찌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격려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겪어야 하는 언어적, 문화적 한계를 인식하고 서로 받아 주고 이해할 수 있는 친구, 공동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에게 기대하기 보다, 작은 일부터 나부터 먼저 시작해 보자. 커피 한잔 하자 전화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