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흔들리는 ‘갈대’ 꼬리표를 달고 다닌 사람

사진<그리스도의 식탁>

“어서들 이리로 오게! 함께 아침 식사하세!”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 친구들 눈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른 아침, 갈릴리 호수. 아직 물안개가 떠날 채비도 못한 이른 시각. 호숫가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손수 숯불까지 피우시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다.

“우리 혹시 유령을 보고 있는 것 아냐?”

서로들 귓속말로 속삭인다. 제자들, 눈을 비비고 또 비비고 쳐다봐도 분명히 며칠 전 돌아가신 주님이 틀림없다.

“아, 그리들 서 있지만 말고 여기 바위 위에 앉아 함께 아침 식사하세!”

타는 숯불 위로 비추어지는 그분의 모습, 의심할 여지 없는 주님의 모습이 틀림없다. 밤새 고기 잡느라 녹초가 된 제자들, 하나 둘 숯불 가에 불을 쬐며 모여 앉는다. 제자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12 제자들을 기념한 하트 모양의 ‘제자들의 보좌’

숯불 타는 소리가 이른 아침 정적을 깬다. 숯불 연기는 아직 어둑어둑한 하늘로 피어오른다. 잘 구워진 고기를 손수 제자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시는 주님의 손에 숯검정이 묻어있다. 분명히 유령이 아니다. 고기를 받아들고는 모두 말없이 주님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또 본다. 주님은 제자들 보는 앞에서 고기를 잡수신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시장한 제자들, 그때서야 말없이 생선을 먹기 시작한다. 세상에 이런 엄청난 식탁이 어디 있나? 육신을 가진 자들(Mortal bodies)과 부활하신 주님(Immortal body)이 함께 나누는 식사라니! 오래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소위 ‘베드로 수위교회(The Church of the Primacy of Saint Peter)’라고 불리는 기념교회가 갈릴리 해변에 세워져 있다. 갈릴리 북서부 보리 떡 다섯 개와 불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곳에 가까운 해변이다.


갈릴리에 있는 베드로 수위교회

현재의 기념교회는 1933년에 세워졌다. 기념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면‘멘사 크리스티(Mensa Christi)’ 라틴어 팻말과 함께 ‘그리스도의 식탁 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교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의 머릿돌’ 혹은 ‘그리스도의 제단 머릿돌’이라고도 부른다.

놀라운 것은 고고학자들의 발굴 탐사에 의하면, 현재의 교회를 세우기 이전 이미 이곳에 오래된 두 곳의 교회 터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전의 교회는 1263년에 무너졌다. 전통에 의하면 교회당 중앙에 있는 이 바위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셔서 함께 앉아 조반을 나눈 바위라고 한다(마가복음 16:14).

9세기경 이후 이곳을 ‘숯불 자리’로 지켜오고 있다. 한편 기념 교회 밖 호숫가에는 808년부터 거론되었던 제자들을 기념하는 하트 모양의 묵직한 열두 개 돌이 그 해변을 지키고 있다. 하여 그 해변을 ‘열두 보좌(Twelve Throne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갈릴리 바다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많은 사건 중 베드로와 주님의 대화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다. 제자들끼리 서로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별도로 만나신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는 틀림없이 ‘흔들리는 갈대’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었던 뻣뻣한 교만 기가 있는 사람, 자기를 기만한 사람. 빈 무덤까지 달려가 제 눈으로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믿는 믿음을 저버린 실패자.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옛날 삶으로 돌아온 도중에 하차한 제자.

그러니 반석같이 든든한 게바 베드로 그 이름이 어찌 그에게 가당키나 한가. 갈대 꼬리표가 바로 베드로 제모습이다. 혈기의 계급장, 배신의 계급장이 그의 가슴팍에 달려있다.

반석, 열정, 든든함의 상징인‘게바’베드로의 이름 대신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를 상징하는 ‘시몬’으로 그를 부르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참으로 묘한 대화가 세 번씩이나 오고 간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하신다. 주님은 좀 짓궂으시다. 베드로의 부끄러운 아픈 상처를 왜 다시 들추어내시는가? 세 번의 배반(Three denials)을 세 번의 질문(Three questions)으로 치료하신다. 게다가 숯불 앞에서 배신한 그에게 숯불을 피워놓으신 후 질문하신다.

어떻게 보면 정신 의학적 치료 처방을 선택하신 듯하다. 베드로가 구멍 난 그물을 손질하듯, 예수님은 베드로의 구멍 난 삶을 한 코 두 코 망가진 그물코를 손질하신다.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한다 말했지만, 이제야 제 모습을 살펴보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짐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돌보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는 의미를 담은 동상

갈릴리 해변의 아침,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생을 다시 수리하신다. 주님은 사랑 수리 전문가시다(The Master of repairing love.). 주님의 사랑 수리 처방은 무조건 실수를 덮고 묻어두는 부실수리공법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우물가 여인의 인생을 치료하실 때도 똑같은 수리공법을 쓰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으신다. 다만 베드로의 가능성을 보시고 설득하신다. 인생 실패의 쓴맛을 아는 자라야 인생 단맛의 소중함을 안다.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더욱 위험한 사람일 수 있다. 평생 뻣뻣이 목에 힘주고 교만스럽게 살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의 어제를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미래를 보셨다. 자기 몸까지라도 바칠 수 있는 그의 순교 열정을 보셨다. 베드로의 추진력 있는 신앙의 원동력을 보셨다(The potential of Peter’s impetus.).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넘실거리는 태평양 바다가 멸치 새끼 한 마리 보고 “멸치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었다고 하자. 넓고 넓은 태평양 바다가 뭐가 아쉬워 멸치 새끼 한 마리에게 사랑을 구걸하였을까? 바로 그 말이다.

“멸치야, 네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넌 죽을 수밖에 없어…”

사랑의 구걸이 아니라 진한 충고다.

“너 날 사랑하지 않으면 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살게 될 거야… 베드로야, 이제부터는 말로 잘하겠다 뻐기며 실수할 게 아니라, 나의 양 떼를 돌보며 너의 참 모습을 보여줄 수 없겠니?”

베드로, 결국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에 체포된 후 사랑의 포로가 된다(Peter’s been captured and arrested by the love of the Risen Lord Christ.).

“내가 부활을 사실로 믿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든 것은 모두 잘못된 오류였다.” 독일 시성 괴테가 노년에 고백한 그의 인생 진리처럼, 베드로 역시 부활의 신품종 제자로 태어난다.

이후로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는다. 인생의 가장 혹독한 괴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에 포로가 된다. 베드로, 결국, 갈대 꼬리표를 뗀다.

Reference:http://www.seetheholyland.net/tabgha; http://www.gty.org/resources; http://www.sil.org/system/files; https://en.wikipedia.org/; http://www.josemariaescriv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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