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한 네 번째 , 죽음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7) 하셨던 경고는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인류에게 죽음이 왔다. 죄를 짓기 전에도 에덴동산에 죽음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창세기 3:22).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인간의 육체는 모두 부활한다면(요한복음 5:29)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를 의미한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분리’(separation)와 관련이 있다.

첫째로 육체적인 죽음이다
육체적인 죽음은 몸에서 영혼이 분리된 상태를 일컫는다(야고보서 2:26). 필자가 신학을 공부할 때 장례식장에 가서 뉴질랜드에서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 장례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관찰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분의 주검을 대했을 때 그 분이 단지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아 신기했던 적이 있다. 한국에서 보았던 망자의 모습과는 판이했다. 그때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히 잠시 잠자는 것 같았지만 대화할 수도, 무엇을 먹을 수도 없는 분명히 영혼이 없는 죽은 상태였다.

둘째로 영적인 죽음이다
영적인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이사야59: 2).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고 분리된 상태(로마서 8:9), 그것이 ‘영적인 죽음’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자’이며(에베소서 2:1), 영적인 일들을 깨닫지 못한다(고린도전서 2:14).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타’인데 이는 ‘과녁을 빗 맞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그것이 인간이 지향하고 맞히어야 할 과녁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죄’인 것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결코 살지 못한다. 그 죄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셋째로 둘째 사망이다
‘둘째 사망’(요한계시록 21:8)이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과 기회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둘째 사망을 맞이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곳’ 그곳의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 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자’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 수 있다(마태복음 5:45).

이 땅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도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선사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16).

하나님은 반역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곳’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공의’는 ‘공평과 정의’라는 두 단어로 쓰기도 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미쉬파트와 체다카’의 번역으로 관용어처럼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할 때가 많다.

영어로는 ‘justice and righteousness’로 주로 번역한다. ‘의’로 번역하기도 하는 ‘righteousness’는 무슨 뜻일까? 간단히 말해 ‘옳은 일’이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말한다.

공평은 무엇인가? 공평은 말 그대로 공평한 것을 말한다. 친분이나 신분에 의해 치우치지 않는 판결, 행한 대로 정확히 갚아주는 공정함, 그것이 공평이다. 하나님은 올바르시며 공평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원리도 ‘공평과 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공평과 의’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공평과 의’가 실현되지 않을 때 심판을 내리셨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도 그들이 ‘공평과 의’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사야 5장).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는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죄의 값을, 또한 그 판결을 피해 갈 수 없다. 죄 있는 자를 죄 없다 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요,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죄의 삯으로 내려지는 죽음과 저주와 심판은 당연한 귀결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동전 양면과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있어서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하실 올바르고 공평한 일이‘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동전의 한 면인 하나님의 공의 앞에만 섰다면 이 땅에 존재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가는 장면은 그의 죄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그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일은 장차 인류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일의 예표로,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였다.

가죽 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는 그 가죽을 제공할 짐승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 짐승의 희생은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렸다.

이는 이후 희생을 통해 부끄러움을 가리는, 다시 말해 죄를 사함 받는, 하나님의 위대한 인류를 향한 계획을 예표하는 제사 제도 탄생의 전주곡이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았으면서도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벨은 믿음으로 짐승의 희생이 있는 제사를 드렸다.

그가 단지 목축을 하는 자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에 짐승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히브리서 11:4).

결론부터 말하면 이 짐승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전(redemption)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인류 구원계획, 그것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흥부가 죄는 없지만 양반들이 죄를 지어 곤장을 맞아야 할 때 흥부가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았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단지 흥부는 돈을 받고 죄를 지은 양반을 대신해 곤장을 맞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돈도 받지 않고, 값 없이 우리의 죄 값인 죽음과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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