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3월 셋째 주 찬송/ 3월 넷째 주 찬송

3월 셋째 주 찬송 66장(통20장) 다 감사드리
우리는 몇 회에 걸쳐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 요소인 ‘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요소인 ‘하나님께 드려짐’, 즉 찬송의 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가사, 아무리 훌륭한 멜로디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찬송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학자들은 예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 정의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대화’인 것입니다. 대화를 영어로 ‘다이아로그’(dialogue)라 합니다. 다이아로그의 반대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모노로그(monologue), 독백, 독화이지요.

하나님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예배, 하나님 없는 찬송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부분’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로서의 찬양은 마땅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노래는 찬송(Hymn)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찬송은 “온 맘을 주께 바쳐” 하며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루터파와 가톨릭과의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 끝나고 평화를 맞이하면서 싸움에서 승리한 독일 삭소니(Saxony)의 선거후는 역대상 29장 13절을 교회에 주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 때 링카르트(Martin Rinkart, 1586-1649)목사가 “자,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Nun danket alle Gott)는 감격적인 찬송 시를 지었습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독일 삭소니의 아이렌부르그(Eirenburg) 태생으로 라이프지히 대학교수를 하며 합창단 지휘도 하는 음악에 소양이 깊은 분인데요, 나중에 목사가 되어 고향인 아이렌부르그에서 부감독까지 지냈습니다.

전쟁과 빈곤, 질병으로 인해 수천 명이 죽고 아내까지 잃는 비통한 상황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면서 여러 편의 찬송을 남기고 있습니다.

찬송 시의 1,2절은 외경의 집회서 50장 22-24절을 기초로 하여 지은 시인데, 본문은 이렇습니다.

“자, 이제 만물의 하나님을 찬미하여라. 그 분은 어디에서나 큰일을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나날을 높여 주셨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주님!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우리 시대에 평화를 주시며 이스라엘에 영원한 평화를 주소서. 우리에게 항상 자비를 베푸시고, 이 시대에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3절은 찬송 시의 전통에 따라 ‘영광송’(Gloria Patri)으로 마무리합니다.

곡명 NUN DANKET을 작곡한 크뤼거(Johann Crüger, 1598-1662)는 저 유명한 코랄 ‘주는 귀한 보배’(Jesu, Meine Freude, 81장)의 작곡가이기도 한데요, 우리 찬송가에 ‘다 감사드리세’(66장), ‘귀하신 예수’(152장)와 함께 세 편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독일 올뮛츠(Olmütz)의 예수회 대학과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의 시 예술학교를 거쳐 비텐부르그(Wittenburg)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베를린의 성 니콜라스 교회의 칸토어로 있으면서 성가대 봉사와 작곡을 했습니다.

코랄을 비롯하여 모테트, 성가 합창, 협주곡 등 여러 작품을 1647년에 작품집 ‘Praxis Pietatis Melica’에 수록했습니다. 독일의 회중찬송을 코랄(Chorale)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코랄은 원래 6성부인데, 멘델스존이 그의 작품 ‘찬양 송가’(Lobgesang, op.52, 1840)에서 4성부인 지금의 형태로 편곡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J.S.바흐는 이 코랄을 주제로 한 칸타타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 BWV.192, 1730)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대감사가’인 ‘테 데움’(Te Deum)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J.S.바하의 종교개혁주일을 위한 칸타타 ‘주 하나님은 태양이시며, 방패이시라(Gott der Herr ist Sonn’und Schild, BWV.79)’에서는 두개의 호른 중주가 어울려 이 코랄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3월 넷째 주 찬송 150장 갈보리산 위에
카톨릭 성당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여러 모습들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새겨 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지요. 라틴어로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란 뜻인데 십자가 정거장(Station of the Cross)이라고도 합니다.

성지순례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던 그 처소마다 머무르면서 기도를 올리는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은 빌라도의 집에서 출발하여 십자가를 지신 곳,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다 넘어지신 곳, 어머니 마리아와 만나신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베로니카(Veronica)라는 여인이 손수건을 주어 땀을 씻으신 곳, 쓰러지신 세 곳(두 번째는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예루살렘 여인들과 만나 위로하신 곳, 로마 병사로부터 옷을 벗기고 찢어 나누던 곳, 땅바닥에 놓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가 있던 곳, 시신을 내려놓은 곳, 예수님을 안장한 무덤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열네 처소에 이르는 길입니다.

‘갈보리산 위에’ 이 찬송은 우리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며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게 합니다. 처음의 “갈보리 산 위에” 의 ‘미파솔파라솔’은 “십자가 섰으니” 에서 2도 상승한 모방으로 ‘솔솔라솔시라’로, 그리고 “주가 고난을” 에서 ‘라라시라솔’로 2도씩 상승하여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악보의 오르고 내리는 경치를 보면 마치 갈보리 산으로 오르는 비아 돌로로사 같습니다. 갈보리(Calvary)는 성경에 골고다(Golgotha)로 표현된 라틴어 명칭입니다.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의 ‘흘림일세’(3절의‘보혈일세’)도 피를 흘리듯이 ‘파미레도’하며 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례의 길은 계속됩니다. 후렴에서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는 마치 십자가 위로 따라 올라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드디어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와 “험한 십자가” 에 이르러선 마치 주님과 함께 시상대에 오른 듯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아름다운 찬송의 작사 작곡자는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Youngstown) 태생의 베나드(George Bennard, 1873-1958) 목사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가난한 환경으로 이루지 못하다가 독학으로 준비하여 부인과 함께 어렵게 구세군사관교육을 받고 구세군의 한 군단 책임자로 봉사하였습니다. 감리교 감독교회로 교단을 바꾼 후부터 부흥사로 사역하면서 영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베나드 목사는 평생 300곡이 넘는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였는데, 오직 이 찬송가 한 편만이 즐겨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이해를 위하여 연구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던 중에 이 찬송의 제목인 ‘험한 십자가’(the old rugged cross)란 어휘가 떠올랐고, 이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면서 작시하기까지 수개월동안 고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1913년 어느 날, 미시간에서 부흥집회를 하던 중에 갑자기 이 시를 막 읊어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마침 옆에 있던 동역자가 듣고 즉시 옮겨 적어 완성되었습니다.

곡명 OLD RUGGED CROSS의 멜로디도 그 해 미시간 주 포케이건(Pokagon) 감리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하는 도중에 완성했습니다. 베나드 목사가 손수 기타반주로 그 교회담임목사인 보스윅 목사에게 들려주었더니 감동을 받아 그 즉시 악보를 프린트해서 밤 집회 때에 이 찬송을 사중창으로 불렀습니다.

1913년 6월 7일, 이 날이 초연일(初演日)입니다. 이 후 이 교회는 이 날을 ‘험한 십자가의 날’(The old rugged cross day)로 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가지고, 작곡자인 베나드와 초연 때의 연주자이름을 새긴 기념비도 세워서 이를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미시간 주의 리드(Reed city)에 가면 우리나라의 장승처럼 도로변에 “험한 십자가” 란 글자를 새긴 거대한 통나무 십자가가 있는데, 오가는 이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주 예수님을 언제나 생각하게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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