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구약시대에 있었다는 제사제도는 몹시 낯설기만 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구약시대와 같은 제사를 크리스천들이 드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없어진 제사제도가 구약에는 왜 존재했던 것이고 지금은 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가인과 아벨의 제사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와 관련하여 구약성경에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있다. 직업이 농사꾼이었던 가인은 땅에서 수확한 소산을 제물로 드렸고 목축업을 하던 가인의 동생 아벨은 양의 첫 번째 태어난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이 일로 시기 질투심이 폭발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창세기 4:1-8).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땅의 소산물이 양보다 값 싼 것이라서 그랬을까? 혹시 가인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러나 잡초와 싸워야 하는 농사가 목축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뉴질랜드에 사는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또 다른 장면이 오버렙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그의 아내 하와와 함께 죄를 짓고 쫓겨나기 전, 그들은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부끄럽게 여겨 무화과나무 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 대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셨다. 무화과나무 잎 보다야 가죽옷이 더 튼튼하고 비싼 것이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크게 선심 쓰신 것일까?
그러나 그때는 동물들이 곳곳에 널려있던 때였고 필요하다면 아담과 하와가 직접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직접 가죽옷을 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셨을까?(창세기 3장)
제사와 예배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의 첫 5권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모세오경’ 또는 ‘율법서’라고 부른다.
성경을 차례대로 읽으려고 창세기부터 읽어나가다 보면 레위기에 이르러 복잡해 보이는 여러 제사제도의 규례, 정결규정, 여호와의 절기에 관한 규례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규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계약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그들의 백성과 소통하셨다.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에 대한 영어 단어를 보면 service라고도 하고 worship이라고 표현한다. Service는 한국말로 번역하면 ‘봉사’ 또는 ‘섬김’이란 뜻인데 왜 예배에 해당하는 단어가 service일까? 이는 예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가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다.‘자신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굴복하며 그분을 섬기는 행위’를 뜻한다.
또 다른 단어 worship은 worth(가치)와 ship(신분)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가치)을 바르게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예우해 드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알게 되면 우리는 감히 그분에게 접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의 존귀하심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 앞에 엎드릴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에도 이런 섬김과 하나님의 존귀함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여러 까다로운 규정들을 따라야 했다. 제사를 위해 특별한 장소, 제물, 제사장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장소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하신 설계도대로 만든 성막이어야 했다. 이 성막은 후에 하나님의 허락 아래 솔로몬 시대에 성전으로 대체된다.
성막을 대체한 성전이 AD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부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도 특별한 장소에서만 제사가 가능하다는 이 규례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또한 일일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죄와 관련하여 드렸던 속건제, 속죄제에 양이나 염소, 비둘기의 피와 희생이 필요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제사는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 드려야만 했다.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주셨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는 오늘날의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 제사제도에 이런 조건을 두어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까다롭게 하셨을까?
제사제도에 까다로운 규정이 존재하는 이유
첫째로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존귀’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세속과 구별을 통해서 일부 드러낼 수 있다.
‘거룩’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카도쉬’에서 유래했다. ‘카도쉬’는 ‘구별’을 의미한다.
보온 밥통이 없었던 필자의 어린 시절, 겨울이면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만 쓰시는 밥그릇에 정성스럽게 밥을 담아 이불 속에 보관하셨다.
짓궂게 방안에서 뛰어 놀다가도 아버지의 밥그릇이 들어있는 이불 쪽에는 함부로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존귀한 분이셨다. 어린 시절, 구별을 통해 아버지는 존귀한 분이시라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세속과 구별된 ‘성막’이라는 장소, 흔히 볼 수 있는 동식물과 따로 구별하여 놓았던 제물,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제사장. 이 모든 것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며 하나님의 존귀함을 깨닫게 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성막과 제물과 제사장,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히브리서 10장1절에서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뜻일까? 구약시대에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렸던 속건죄, 속죄제 등 구약의 제사들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 즉 진짜가 아니고 모형이라는 이야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고편, 시청각 교재로 보여주는 설명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장차 올 좋은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아벨 제사만 받으셨던 이유도(히브리서 11:4),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것도, 제사제도를 통해 볼 수 있는 참 예배의 모습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