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계속되는 선교적 교회 공동체의 꿈

차세대를 위한 선교적 교회의 꿈을 가지고 웰링턴에 내려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이 글을 쓰는 것도 이제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선교적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그동안 연구하고 준비한 것으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멋지게 목회하고 싶은 들뜬 마음으로 용감무식하게 내려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교회공동체가 한 명 두 명 모여 함께 예배하기 시작한지 오늘이 벌써 41번째 주일이 되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고 또 새로운 헤어짐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공동체는 그렇게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있다.

지난 주간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잘 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선교적교회 공동체를 목회하고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내 마음속을 번잡하게 만들었다. 몇 주 전부터는 이 생각들이 계속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강성준목사님 맞지요?”
“네 맞습니다……”
“O월 O일 저녁에 시간이 괜찮으시면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교민 대표들을 초청해서 열리는 어떤 모임에 초청하는 전화였다. 웰링턴에 오니 교민도 적고 교회 숫자도 적어서 그런지 나같은 초짜 목사도 행사에 초대를 받는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장소에 도착했다. 거의 대부분 처음 보는 분들이라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작은 교민사회에 세워진 4번째 교회이기에 교민들께 인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마치 TV에서 보는 만찬처럼 행사 전 음료수를 한 손에 들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물론 나도 새로운 분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분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올해 새로 개척된 교회의 목사라고 나 자신을 소개하자 그분은 내 이야기를 미리 들었다는 듯이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어 주었다. 이윽고 그분은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목사님! 몇 백 명 되지 않는 웰링턴에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 겁니까? 옛날에는 교회가 하나 뿐이어서 심지어 천주교 교인들도 그곳에 함께 모이곤 했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너무 많아진 것 아닌가요?”

그분이 갑작스런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내 당황한 모습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너무 직접적인 말을 한 것이 멋쩍었는지 다시 이어 말을 한다.

“뭐 많으면 좋은 거겠지요. 허허허”

나같이 세상을 잘 모르는 목사들이 쉽게 빠지는 오해가 있다. 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목사를 대부분 환영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목사야말로 주로 믿는 사람들과만 만남을 갖기에 그 교제의 폭이 제한되어 있으니 그렇게 잘못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사실 세상은 교회에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교회가 생겨나는 것에 관심이 없으면 다행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선교적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지않고 개 교회 중심적인 방향을 갖고 있다면 교회는 세상 속에서 눈엣가시 같은 이기적인 존재로 남아버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는 오히려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바꾸어 주어야만 한다. 마치 초대교회가 선교적 교회 공동체로 살아남았던 것 같이 말이다.

사도행전에 신약교회가 맨 처음 시작되었을 때 로마사회는 교회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다.
네로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서 로마에 불을 지르고 건물들을 새롭게 재건해갔다. 그리고 그 방화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덮어 씌웠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방화범의 누명을 쓰고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밤에 모여 떡을 떼며 성찬으로 교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사회에서 더 큰 오해를 받았다.

밤마다 성찬식에 나누는 떡과 포도주를 사람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는 것으로 오해받아 괴물 같은 식인종으로 대우를 받았다.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사이비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의 출현으로 자신들의 성경인 구약을 인용하고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악랄한 이단집단으로 오해받았다.

로마의 카타콤이나 터키의 데린쿠유를 가보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깊은 땅굴 속에서 몇 년씩을 살았는지 상상이 안될 정도이다. 교회는 그렇게 핍박을 피해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숨어 목숨을 이어갔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교회는 세상에서 멋지게 떵떵거리며 세워지기보다 오해를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핍박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그래서 선교적교회 공동체는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복음을 들고 싸우며 세워진다. 교회는 그렇게 첫 번째 이 땅에서의 시대를 살아남았다.

그날 만난 그 교민과의 대화가 잠자는 내 영혼을 다시 한번 뒤흔들어 깨워 놓았다. 아직도 여기 웰링턴까지 와서 나는 큰 착각 속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셈이다. 페이스 북에 나와 가까운 지인들이 격려해주고 동료 목사님들이 위로해주니 나는 그 인정과 칭찬 속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작은 교민사회에 왜 또 교회가 생겼는지? 의심하고 비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부정적인 시각들이 선교적교회 공동체를 만나 하나하나 눈 녹듯이 녹아지도록 그렇게 교회는 선교적인 공동체로 날카롭게 세워져야 살아남는 것이다.

이번에 멈춰진 발걸음은 좀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더 많이 지나가기 전에 처음에 꿈꾸던 그 선교적 공동체가 잘 세워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고민의 끝에서 나를 만나 다시 그 걸음을 시작하게 하실 것을 믿기에 나는 오늘 또 다시 선교적 교회 공동체에 대한 꿈을 꾸며 기도한다.

“아이구 그 교회가 세워져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여기 웰링턴에 꼭 필요한 교회였네요.”
“우리 웰링턴에 그런 교회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야기 될 어쩌면 그때가 정말 선교적 교회 공동체의 길을 멋지게 걷고 있는 때가 아닐까? 내년에는 좀더 선교적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해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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