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거절당했고, 비난당했고,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좋은 열매들이 나타났다. 인간적으로는 처참하게 망가졌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선한 열매들이 가득했다. 그는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결실을 얻었을까?
그는 한 목적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 후에 한 가지 목적만을 품었다. ‘땅 끝까지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의 눈에는 복음을 전할 사람들만 보였다. 뜻을 정했으면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전진해야 한다. 자꾸 흔들리기 때문에 결실까지 보지 못한다. 기도하고 뜻을 정했으면 열매를 수확할 때까지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런데 상황이 안 좋았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자들도 알았고, 장로들도 알았고, 사도 바울도 알았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만류했고,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성령의 말씀을 받아서 만류했다. 그들의 예언은 정확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위험한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사랑,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방교회에서 거두어 준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주면서 예루살렘과 이방교회가 하나 되고,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교회의 중심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언 때문에 벌벌 떨지 말자. 예언보다 사랑이 강하면 예언을 뛰어넘는다. 예언보다 사명이 더 강하면 예언을 뛰어넘는다. 예언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면 최악의 환경과 조건까지도 뛰어넘는 위대한 헌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뜻을 정했으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뜻을 정한 사도 바울, 흔들림 없이 오직 한 길로 걸어갔다.
뜻을 정했으면 값을 지불해야 한다
선한 뜻은 그 크기만큼의 고난이 온다. 피해 갈 수 없는 고난이 온다. 그 고난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내야만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선한 뜻을 품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인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바울을 죽일 수 있을까 만을 찾고 있던 극렬한 반대자들이었다.
바울에게는 두 가지 죄목이 씌어졌는데 하나는 모세의 율법을 공격하고 정면으로 배치하는 말씀을 전한다는 죄목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을 거룩한 성전의 뜰에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이다.
둘 다 오해요, 추측으로 만들어낸 죄목들이다. 천부장이 그를 구하러 오기 전까지 성난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다가 실패했고, 또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도 바울의 죄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극렬한 유대인들은‘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독하게 결심한 40여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당한 비난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17:6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
17:7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 자
21:28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는 자
22:22 세상에서 없어야 할 자
23:18 죄수
24:5 염병을 일으키는 자,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괴수
24: 성전을 더럽히는 자
동족들에게 이렇게 지독한 모독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로 호송된 후 조사할수록 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뇌물을 받을 욕심을 품고 있던 총독들 때문에 재판을 2년간이나 끌었다. 끈질긴 고난을 당했다. 선한 열매를 얻기까지에는 길고 지루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난의 과정을 견뎌낸 사람만이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 놈의 사랑 때문에 피해갈 수 없었다
바울은 혹독한 풍랑 속에서도 살아남아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다. 한 로마의 군인이 지키는 가운데, 셋집을 얻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을 청하여 복음을 증거했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했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증거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두절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 30-31)
2년 동안 갇혀 있던 가택연금 상태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다. 능력, 기쁨, 평강의 선언들이 평화의 상태에서 쓰인 글들이 아니다. 가장 힘든 감옥생활 속에서 선포된 말씀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어려운 길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피하지 않았다. 아니 못 피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버릴 수 없어서였다. 그의 눈에는 항상 그가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피해서 도망가 버리면,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릴 수많은 이들이 보였기 때문에 그는 고난 당할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도망가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개역)
그는 고백대로 살았고, 고백대로 순교했다. 뉴질랜드를 사랑하기 때문에 뉴질랜드를 다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이 가득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