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게 “정말로 닮고 싶은 교회를 성경 속에서 찾아보라” 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터키땅에 존재했던 안디옥교회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본받기를 원하는 교회가 초대교회라고 말하지만, 정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했던 교회는 그 어느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교회였음을 사도행전 13:1-3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정말로 본받고 따라야 할 교회를 안디옥교회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그 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을까?
예배가 중심인 교회
안디옥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특별성은 예배가 가장 중요한 선교적 행위임을 깨달았던 교회라는 사실이다. 금식을 하며 예배를 사모하는 이들의 예배적 삶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영역임을 생각해본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교회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교회는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충만한 교회 시대가 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어떤 신자일까?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말하는 특정한(?) 그룹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안디옥교회에 하나님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에 그들의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워 보낼 것을 명령하셨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파송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령에 민감하지 않았다면 이 음성을 들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순종할 수도 없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풍성함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순종의 여부를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결단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교회
흔히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행전1:8절의 말씀을 단순히 전도를 위한 교회의 수적인 증가를 위한 명령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사와 교회사에 일어났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바로 선교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끄심이 있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보게 된다.
선교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이 글로벌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는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통해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즉 성령의 임재를 교회 공동체가 체험한다는 점이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희가 권능을 받고….” 에 귀결된다. 교회의 힘, 능력, 에너지는 바로 성령의 충만함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때 이 사명과 이 비전을 품고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1:8 절의 말씀대로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물론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허락함 가운데 일어났지만) 안디옥까지 이르렀고 교회가 설립되고 그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마땅한 명칭인 것이다.
우리가 심각히 고민하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 교회내의 필요들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교회의 필요가 전도와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우선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예배의 부흥과,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고 반응할 수 있는 순종하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라는 것이다. 즉 민감한 경청과 순종이야 말로 제자의 삶에 대한 고민에 대한 답변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성령님은 가장 최상의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보내신다
안디옥교회가 순종하는 교회라는 면은 바로 성령님께서 안디옥교회를 세운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보내라는 명령을 하셨다는 점일 것이다.
안디옥교회 가운데 이미 교회개척의 경험이 있는 최상의 준비된 후보자는 두말 나위 없이 바나바와 바울일 것이다. 즉 그들의 담임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교회가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인임을 안디옥교회에게도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면에서 안디옥교회가 위대한 것이고 그들의 순종은 값진 것이었다 이들을 보낼 때 안디옥교회도 하나님이 어떻게 훗날 세계사를 이 두 사람의 헌신을 통해 바꾸어 놓으셨는지는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시절 로마의 핍박, 그리고 공산주의, 그리고 이슬람의 강력한 약진으로 반기독교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만큼 종말을 향한 하나님의 시계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로 우리는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의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복음주의적 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교회의 지향적인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세계 곳곳에 1만 명이 넘는 메가 처치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지만, 선교적인 교회(Missional church)의 건강한 교회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음을 안타까이 여긴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안디옥교회와 같은 꿈과 비전을 가질 뿐 아니라 순종으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필요한 때이다.
Acts 13 의 비전을 우리 모두가 함께 꿈꾸기를 기도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