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발자취의 흔적을 따라가보고자 무작정 길을 나섰다. 오후 3시 카자흐스탄의 제1도시 알마티(Almaty) 버스터미널에서 18인승 미니버스에 올라 300km 거리에 있는 우슈토베(Ushtobe)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는 도착해서 알아보기로 하고 가벼운 맘으로 일단 출발.
시작은 참 좋다. 미니버스에서도 발 뻗기 가장 편한 문 옆자리에 앉았고, 옆자리엔 간간히 창밖 풍경과 지역을 설명해주시는 친절한 카작 할아버지와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은 얌전한 손녀가 앉았다. 창 밖엔 끝이 없는 알라타우 산맥이 광활하게 펼쳐졌고 버스는 알마티를 벗어나 비포장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도착 예정시간이 지났는데도 우슈토베는 아직도 멀었다.
오후 7시 해 질 녘 즈음 슬슬 숙소를 알아봐야겠다 싶어 휴대폰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우슈토베 호스텔, 게스트하우스’키워드로 검색…
‘어라? 없다… 관광지가 아니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럼, 호텔?’
우슈토베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호텔이 있다! 허나 가격이 보통 호스텔의 다섯 배 이상, 그 사이 해가 졌고 어둑해진 창 밖을 바라보자니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온다. 버스가 종점인 탈디고르간에 도착한다고 끝이 아니라 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우슈토베 마을까지 들어가야 한다.
이 모든 상황 아시는 주님께 SOS 를 요청했다.
“숙소가 없네요… 버스에서 내려 우슈토베까지 밤중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1세대들은 갈대밭에 버려지다시피 해서 한겨울에 이 근처에 토굴을 짓고 살아남았다는데요… 숙소가 정 없으면 노숙이라도 하죠. 그래도 주님, 크라스키노(러시아/북한/중국 접경지역) 에서 처럼 친절한 천사 한 명만 보내주시죠.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든 밤에 평안히 눕기도 자기도 할 수 있도록 보호하셨으니 오늘 또한 믿습니다!”
문득 우슈토베에 거주하신다는 뒷자석의 고려인 아저씨 한 분이 떠올랐다. 휴게소에서 잠깐 인사 나눈 게 전부인 스포츠 머리에 무뚝뚝하게 담배를 피우시던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고려 말은(한국말) 못하시는 것 같아 러시아어로 짧게 인사했었는데, 18명 승객 중 우슈토베로 가는 승객은 나와 아저씨 뿐이니, 아저씨를 축복하는 것이 나의 살 길이다!
“주님, 저 고려인 아저씨를 축복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나에게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우슈토베로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하여금 숙소를 발견해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저녁 8시, 밖은 캄캄해졌고 날씨도 싸늘해져 긴 남방과 재킷까지 꺼내 입자마자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다. 이제부턴 아저씨를 졸졸 따라다녀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이 무뚝뚝한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며 내 어깨를 치더니“다바이”(러시아어‘가자’) 짧고 굵게 외치며 앞서 걷는다. 아저씨는 택시기사들에게 가격을 묻더니 맘에 안 드셨는지 맨 앞에 있는 낡은 봉고차에 타자고 하신다. 한 사람당 300땡게에 낡은 봉고택시는 우슈토배행에 합의했고 아까보다 훨씬 더 열악한 비포장길을 달렸다.
아저씨께 감사하단 말과 함께 어설픈 러시안으로 여쭈었다.
“혹시 우슈토베에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있나요? 인터넷에서 못 찾았거든요…”
“가스티니차(호텔) 예스.”
“아… 호텔은 너무 비싸지 않나요…?”
“기다려봐”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하신다.
“마마, 지금 혼자 있소? 곧 가오. 음, 까레야 (한국)에서 온 사람 옆에 있소, 호텔이 없는데 집에 같이 가오. 한 명, 한 명, 여행 중”(고려 말+러시안 반반인 통화내용을 난 기적적으로 다 알아들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이 아저씨가 천사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에 감사함이 몰려왔다. 고려 말을 하시는 걸 확인하고 그제서야 반갑게 우리말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아저씨는 내게 “내 집에 같이 가오, 마마 집에 혼자 있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렇게 쉽게 호의에 응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이 찬스, 무조건 잡아야 한다. 한민족의 따스한 정, 만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 없소~”
“정말 감사합니다!”
“마, 일 없소”
55세 안아르카지 아저씨는 할머니 할아버께서 우슈토베에 처음 정착하여 아저씨의 어머니(현재 77세)를 낳았고, 어머니는 자신을 포함한 삼 형제를 이곳에서 낳았는데 형제들은 모두 더 나은 삶을 위해 대도시인 알마티로 십 년 전쯤 이주해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삼 형제는 돌아가며 연중 두어 번씩 이렇게 어머니를 방문한다고 한다.
밤 9시가 되어서야 아저씨 고향집에 도착, 이곳이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최초 정착지 우슈토베 마을이구나! 카자흐스탄인데도 한국 시골에 온듯한 이 묘한 느낌은 왜일까? 청색 페인트칠된 철문을 열자 바둑이가 짖어댄다.
아저씨는 “이지에쑤다!(저리 가!)” 하며 개를 쫓아낸다. 머리에 보자기를 두르신 할머니께서 아들과 이방인을 맞아주신다. 아저씨는 나를 식탁에 앉히더니 처음 보는 고려인 가정식 상차림 메뉴를 일일이 소개해주신다.
“어서 드오, 짐치(김치), 가지고추(조림), 회(얼린 회무침), 다기(닭)”
이럴 수가, 멀리서 온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어머니의 진수성찬을 감히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결국 아저씨보다 내가 두 배는 더 먹었다.
“얜 이리 많이 먹니?”
“러시아말 알아들어~”
두 모자의 러시안 대화가 왜 들리는 걸까. 조금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이미 끼친 민폐, 맛있게라도 먹는 게 더 예의다 싶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오친 푸쿠쓰나! 정말 맛있어요!”감탄사 연발, 실로 맛있었다. 밥을 먹다 강정에 차까지 내어주신다. 설거지라도 하려고 일어서자 아저씨가 단호히 막으셨다.
“둬라 ~!”
“아뇨, 이건 제가 할게요”
“둬라!”“
결국 밥만 축내고 아저씨의 인도함을 받아 거실 소파에 앉아 할머니와 함께 내 노트북에 있는 한국, 뉴질랜드 사진을 관람했다. 아저씨 가족 모두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할머니(고려인 2세)는 태어난 마을 우슈토베에서 안씨 아저씨(3세)가 태어나 자란 집 거실에 둘러앉아 우리는 17년 전 할머니 환갑잔치 때 촬영한 DVD영상을 시청했다.
광복 70주년 특별 한민족 동포 다큐 한 편 속으로 들어가 함께 숨쉬는 듯한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영상 속에는 고려인 2, 3, 4세, 러시안 며느리, 카작 며느리, 손자손녀들, 할머니 절친들이 웃으며 게임하며 먹고 마시며 춤추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뭐라도 해야지 싶어 시크하신 할머니 어깨 안마를 해드렸다. 잔치영상 시청 완료 후 아저씨가 깔아준 옆방 잠자리에 누워 한없는 감사를 드리며 잠에 들려 한다. 또 이렇게 무사히 하룻밤을 지내는구나. 한민족의 따스한 정으로 낯선 여행자를 먹여주고 재워주신 우슈토베 고려인 어르신들의 환대 절대 잊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