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칼럼을 통해서 에스비 베반스(S. B. Bevans)와 알피 스크로더(R. P. Schroeder)의 사도행전이 말하는 7가지 선교적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특징이 선교적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부분이었는데 사도행전은 이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기다림’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제시했다. 선교적교회 공동체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그 공동체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 간다.
이번 글에서는 그 두 번째 특징을 살펴 볼 차례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두 번째 선교적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 번째 특징이었던 기다림을 통해 무엇을 기다려 왔는가 하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남겨놓은 교회공동체는 무엇을 기다려야 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이었다. 교회공동체는 이 성령님이 오심으로 본격적인 선교적 공동체의 모습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능력은 첫 번째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선교적으로 나타난다. 베드로의 설교는 복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각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재형성한다. 그런 면에서 고신대 송영목교수는 이 두 번째 특징인 성령의 능력을“변혁적인 설교”라고 설명하였다. 성도들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의 능력으로 감동된 설교가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선교적교회의 두 번째 특징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시간들을 통해 정리해왔듯이 선교적교회는 선교 프로그램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교회도 아니고 선교비를 많이 지출하는 교회와도 크게 상관이 없다. 오직 선교적교회는 성도들을 변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선교지로 삼고 선교사적으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이어야 한다. 이런 선교적교회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변혁적인 설교,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 찬 설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주일이었다. 다시 깨어날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던 의사의 판단과는 다르게 아버지께서는 중환자실에서 다시 깨어 나셨다. 마지막 순간이니 가족들을 부르라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나는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고 있었고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아버지는 어찌 힘을 내셨는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신 거다.
비행기 멀미를 너무 심하게 하느라 사실 서있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깨어나신 아버지를 뵙기 위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웠던 아들의 얼굴을 보셨기 때문일까?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신 아버지는 급속도로 상태가 호전되었고 결국 며칠 만에 다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번의 주일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어머니를 찾으신다. 환자가 무슨 외출하실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출하실 기력도 없으신데 침대에 누운 채로 면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병원 침대에서 면도를 마치자 이번에는 나를 부르셨다.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성경책을 들고 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이사야40장 31절을 펼치게 하셨다.“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실 아버지의 상태는 침대에 누워 볼펜으로 글씨를 쓰시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아버지 대신 볼펜을 들고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첫째는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니 이제 겨우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나온 사람이 새벽부터 병원 침대에 누워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나는 처음에 그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그리웠던 아버지의 말씀이니 시키는 대로 따라 적을뿐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그 날 오전에 아버지를 잘 따르시던 여든이 넘으신 권사님과 그 가족들이 병문안을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날이 마침 주일이니 주일예배를 병원에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얼마 후 권사님 가정이 방문을 하자 아버지는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 예배를 드리자고 하셨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 병실에 모인 우리들은 그렇게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찬송과 기도가 끝나자 아버지는 이윽고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나에게 불러 주신 그 본문과 내용으로 차근히 설교를 시작하셨다. 나는 병원 침대 옆 한쪽 구석에 앉아 그 이상하고 별난 주일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늘 새 힘을 주십니다.”
이상했다. 설교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내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실 설교내용이 그렇게 새롭거나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힘있고 웅변적인 설교도 아니었다. 중환자실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몸이니 얼마나 힘없고 연약했을까?
하지만 이상하다. 말씀은 살아서 내 마음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설교를 마치고 이어 축도를 하시고 나자 급속도로 피곤해 보이셨다. 아버지를 부축해 다시 눕혀 드리자 권사님과 그 자녀분들도 서둘러 인사를 하시고는 댁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나는 단둘이 병실에 남았다.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막 신학을 시작하고 전도사가 되었던 나는 아버지의 말없는 얼굴을 보며 그 표정에서 충분히 아버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육신은 약해지고 이 땅에서 남은 시간이 점점 사라져 갈 때 아버지는 목사로 마지막까지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으셨던 거다. 그렇게 내 아버지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설교를 하셨고 얼마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다. 그 병원에서의 주일 설교 말씀이 아버지의 마지막 설교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설교는 아직도 내 삶에 살아 나를 움직인다. 목사로서 설교를 준비하며 힘든 일을 만날 때, 그리고 인간적인 배신과 상처를 입고 강단에 서는 것이 어렵고 힘들 때면 그날 그 설교가 나를 움직인다.
마지막 시간을 코 앞에 두고 몸을 일으키기 조차 힘든 상황 속에서도 새벽같이 말씀을 펴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준비하셨던 그 설교가 나의 나태함과 연약함과 비겁함을 뒤 흔들어 놓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설교, 실제 삶을 움직이는 설교, 그 변혁적 설교가 공동체에 풍성하게 선포되어야만 선교적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다. 그것은 듣는 말씀 따로, 삶 따로 살아가는 교회생활로는 선교적 교회공동체에 필요한 삶 속에 역동적인 사명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 찬 변혁적 설교를 선포할 수 있을까? 나는 오늘도 그 답을 찾아 간절히 기도해 본다. 내가 섬기는 공동체가 선교적 공동체로 온전하게 일어설 수 있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변혁적 설교가 선포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