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어떻게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듣고 있노라면, 고통 당하고 있는 이들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유다인들은 바벨론 그발 강가로 끌려가 절규하며 탄식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러실 수가 있나? 과연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깊은 좌절과 탄식 속에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하셔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에스겔 32장까지는 책망이고, 33장부터는 희망이다. 마른 뼈들이 다시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 지에 대한 희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른 뼈와 같은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거룩함이 회복되어야 산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받아먹게 하셨다. 에스겔이 말씀을 받아먹자 꿀같이 달았다. 말씀을 받아먹음으로 선지자로 쓰임 받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디모데전서 4:5, 개정).

말씀이 우리를 거룩한 자로 씻어낸다. 말씀을 먹는 자가 되어야 산다. 에스겔의 특징은 에스겔 성전이다. 에스겔서 40-48장에서 에스겔의 결론은 성전의 회복이다. 성전이 거룩하게 회복되고, 그 곳에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임하셨다. 에스겔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의 결론은‘여호와 삼마’(48:35)이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의 특징은 사방이 각각 500척 길이의 담이 쳐져 있다. 그리고 동쪽, 북쪽, 남쪽에 문이 있는데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다. 문지기들은 몸과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즉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는 담에 문지기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룩함이 회복되지 않은 자들은 에스겔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의미에서 거룩함이란, ‘따로 떼어놓음, 구별, 성결’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아무나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죄와 단절된 성품을 가진 거룩한 자의 예배만을 받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달라야 한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말씀대로 사는 것 때문에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것이 거룩함의 선택이다. 시대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마음의 거룩함이 회복되면, 인간관계가 달라진다
마음의 전쟁에서부터 승리해야 한다. 마음속에 자아, 즉 에고가 살아있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지면 ‘에고 에고’한다. 하지만 마음에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지면 ‘주여 주여’한다. 탄식 소리부터가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기를 꺾어 버리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팍팍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베드로전서 1:16)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

결국 거룩함의 결실은 인간관계로 드러난다.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려면,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는 거룩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회복되면, 내가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게 된다
에스겔 성전 동문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셨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곳이라 동문은 폐쇄되었는데 그 동문의 문지방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물줄기가 닿는 곳마다 생명들이 살아났다. 그 물 속에는 많은 고기들과 생물체들이 살게 되고, 강의 좌우에는 열매 맺는 나무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고, 잎사귀들마저 약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를 살려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수가 흐른다. 이것이 우리가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수 있는 거룩함이 회복되어야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게 된다.

믿음 생활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말씀대로 사는 거룩함이 회복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거룩함이 회복되어야 신앙생활의 감격이 차고 넘치는 것이다.

다윗 시대부터 포로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에서 아론의 후손인 사독 계열의 레위인들만이 제사장으로 쓰임 받았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독계열의 레위인들은 다른 레위인들과 달리 시세의 변화에 상관없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거룩함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을 지켜냈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에스겔 44:17-27을 보면, 사독인들에게 바라는 하나님의 기대치가 달랐다. 옷 입는 것, 머리 자르는 것, 포도주 마시지 못하는 것, 결혼문제, 가르치고 재판하는 것, 죽은 자에 대한 책임 등등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이 달랐다.

기대치가 높았다. 왜 그러셨을까? 거룩함을 지켜 중용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지불하게 되는 까다로운 규정들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기대치가 다르시다. 그 만큼 아끼고 중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에스겔의 성전 동편 문지방에서 생수가 흘러나왔다. 1000척이 흐른 후에 측정해 보니 발목에 차오를 정도였다. 2000척이 흐른 후에 측정해 보니 무릎에 찰 정도였다. 3000척이 흐른 후에 측정해 보니 허리에 오르는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1000척이 더 흐른 후에 측정해 보니 물을 건너지 못할 정도로 깊어져 헤엄을 쳐야만 했다.

그 은혜의 깊이가 다르다. 발목까지만 담그는 은혜가 있고, 무릎까지만 차는 은혜가 있고, 허리까지만 차는 은혜가 있고, 온 몸까지 채우는 차고 넘치는 은혜가 있다.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임재 하실 수 있는 거룩함이 회복되어, 신명기 28:6절 말씀처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맛을 공급해 주는 샘물 같은 인생이 되기를 함께 꿈꾸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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