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피에르교회서 본 제네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년 만에 독일인의 90%정도가 프로테스탄트가 될 정도로 개혁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독일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종교개혁의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그 후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칼빈에 의해 완성되었다.
프랑스 누아용(Noyon)에서 1509년7월10일 태어난 칼빈의 프랑스식 이름이 장 칼뱅이다. 칼빈은 주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장 칼뱅 I John Calvin
16세기 프랑스는 칼빈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위그노와 전통적인 카톨릭 세력사이의 충돌과 전쟁으로 인한 유혈로 얼룩졌다.
스위스 내의 종교개혁은 다양한 기관이나 개혁자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 중 1523년 취리히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츠빙글리와 1536년 ‘개신교의 로마’라고 불리던 제네바로 이주해온 칼빈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에 이들을 루터와 함께 3대 종교개혁자로 부르고 있다.
종교개혁 전의 프랑스의 영적인 형편
종교개혁 당대의 프랑스는 선량한 로마 카톨릭 국가였다. 파리 대학과 소르본느 대학은 교회적 정통성의 기둥이었고, 중세 말 이래로 성장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추기경은 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의 보좌신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프랑스 역시 심각한 교회적 부패와 세속적 부도덕에 직면하고 있었다. 샹봉이라는 역사가가 그의 저서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종탑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만 해도, 그 주변의 여인들은 임신한다.’고 묘사한 것처럼 프란시스 1세가 즉위할 무렵의 사회적 상황은 역겨운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칼빈의 회심과 피신
1533년에 칼빈의 친구인 니꼴라 꼽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취임식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에 관하여 연설하면서 복음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런 분명한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은 곧장 생명을 위협하는 박해에 직면했다.
그래서 칼빈은 친구와 함께 곧장 파리에서 피신해야 했다. 왜냐하면 꼽의 원고가 상당 부분 혹은 전부 칼빈에 의하여 작성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칼빈의 확실한 회심이 공적으로 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파리에서 피신한 바로 이 순간부터 칼빈은 부름 받은 개혁자가 되었다. 시편 주석 서문에서 칼빈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회심을 이야기 한 후에 일어난 일들을 이렇게 고백했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좀 더 순수한 가르침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나에게 찾아왔다. 초신자와 또 이제껏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지도를 받기 위하여 왔다. 본래 시골 사람처럼 항상 그늘과 휴식을 좋아하던 나는 그때 피난처를 찾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체류하던 한적한 장소들이 공공연한 학교들로 변하였다. 마침내 내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을 때, 즉 명예스럽지 못한 휴식을 즐기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상황 변화를 통하여 나를 바꾸어 놓으셨고,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게 하셨다. 결국 나는 타고난 본성과는 달리 햇볕 아래로 끌려 나왔다.”
또 칼빈은 회심 전에는 자신이 아주 완고한 교황 주의자였다고 고백한다.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그의 모친은 어린 시절 그를 데리고 유명한 성지들을 순례하곤 했는데, 어느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친 성 안나의 유골에 입맞춤한 일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약을 성 안나에게 하였던 마틴 루터처럼, 칼빈 역시 성모의 모친을 통하여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또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다가가려 했던 인본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천주교 신앙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베자의 칼빈 전기에 따르면, 칼빈이 순수한 신앙에 최초로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사촌인 올리베땅을 통해서였다. 그 영향으로 그는 천주교의 예전들을 회피하게는 되었으나 이 시절 천주교와 절연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그가 종교개혁의 진영으로 분명히 옮겨간 것은 성경적 신앙을 억압하려 한 프랑스 당국과의 충돌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제네바사역
제네바에서 1차사역(1536-38)을 시작하기 전 칼빈은 프랑스의 박해 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고자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1536년 3월에 출판하였다. 그 후 칼빈은 성만찬 문제로 토착세력과 대립 후 1538년 4월22일 제네바에서 추방 당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3년 사역 후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14년동안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험한 세월을 보낸 후 잠들었다.
칼빈이 미친 영향
교회의 신학자요, 경건한 학문을 강조한 교육자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추구한 활동가였던 칼빈의 개혁 사상은 유럽 각국에 파급되었다.
특히 제네바 대학에서 교육받은 목회자들이 유럽 각국으로 돌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확산 시켰는데, 위그노(프랑스), 도르트 신조-칼빈주의 5대 강령(네델란드), 존 낙스-장로교(스코틀랜드), 청교도-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영국)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독일 남부지역은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칼빈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독일지역의 개혁주의의 중심지가 되고‘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칼빈주의적 전통의 신앙과 신학이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 리투니아와 헝가리에도 칼빈의 종교개혁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16세기가 아닌 21세기 시간도, 공간도 다른 이 땅에 서있다. 따라서 과거의 칼빈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칼빈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으로부터 근본 원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우리의 상황 가운데 적용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은 칼빈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전혀 새로운 것들이고, 따라서 이 새로운 상황들을 복음의 원리로 해석하여 대안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다시 말해 칼빈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