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시간에 자신의 영적 모습을 그려보라고 했더니 한 분이 그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자신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E.T. 처럼 그렸다.
머리를 엄청나게 크게 그리고 귀는 당나귀 같이 크게 그렸고, 입은 아구처럼 크게 그렸고, 눈은 뱁새같이 가늘고 날카롭게 그렸고, 코는 벌렁코로 그렸고, 가슴은 새가슴으로 아주 작게 그렸고 손과 발은 퇴화되어서 거의 보이지 않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이렇게 그린 이유가 자신이 이렇게 현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들어서 많은 것을 알고, 날카로운 눈으로 비판하고, 유익이 되는 것에는 벌렁코가 작용하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다 보니 가슴은 어느새 새가슴이 되어 있었고 그와 동시에 손과 발도 퇴화되어서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많은 것을 알고 듣고 보며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당연히 이런 사람들을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랑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 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도 잘 안다. 행동으로 옮겨서 내 신앙, 내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움직이지 않고 듣기만 하고 비판만하고 내 중심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다보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는 것이 어색할 정도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이것은 나 혼자 간직하고 있을 때에는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달란트들이 모여져서 시너지 효과를 낼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는 변화산에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다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던 베드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로마서 12:15).”고 하셨다. 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입으로는 축하를 하지만 그 축하에 진정성이 없을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것은 우는 시늉이 아니라 우는 자의 아픈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때, 우리 눈에서도 같은 성분의 눈물이 나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것이나 우는 것 모두가 그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에게로 전해져서 하나가 되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삶은 그냥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성숙한 신앙의 경지로 가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주님의 모습을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사복음서에 보면 많은 환자들을 고치셨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주님을 만났고 간구했고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사복음서의 주인공이 환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간절히 찾고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찾아가 주셨고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누가복음 8:40 이하에 보면 야이로의 딸의 사건에 혈루병을 앓는 여인에 관한 기사가 삽입된 것을 볼 수 있다. 내용으로 보아서는 이 여인이 주님을 찾아간 것 같지만 주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아시고 만나주시기 위해서 직접 찾아가 주셨다는 사실, 주어인 예수님과 여인이 뒤바뀌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같이 주님께서는 아픔을 가지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주시고 만나 주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이고, 내 마음에 주님께서 사인을 주실 때에 그 마음이 흐르는 대로 몸이 따라가 주는 것이 옳은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삶이 바뀌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기 때문이다.
비겁했던 제자들,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 움츠렸던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셨다. 성령님과 만난 후에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뜨거운 감격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기에 그들은 다락방 문을 박차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이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서 뜨거운 가슴으로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하는 예수의 작은 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도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이 입으로가 아니고, 지식으로가 아니고 온몸으로, 내 삶의 현장에서 증거되야 할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사람은 예수쟁이라고 인정하는 예수쟁이로 살아갈 때에 우리가 바로 행동하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만방에 알게 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삶을 통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