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牧師)와 성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으로 훈련하고, 성경대로 살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떠나면 목사는 ‘잡사’(雜師)가 된다.
말씀으로 양을 이끌기보다 잡스러운 일로 동분서주하는 자가 된다. 종교개혁은 목사가 잡사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외쳤다고 본다.
목사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성경 인물 중에 에스라를 좋아한다. 에스라는 포로 귀환 후 성전과 성벽이 재건된 이후 말씀으로 신앙재건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특별히 에스라 7장 10절은 나의 목회 모토로 삼는 말씀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기에 앞서 두 가지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연구와 준행이다. 연구와 준행이 없는 가르침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연구한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준행해야 한다. 연구와 준행을 거친 가르침은 강력하다. 힘이 있다.
나는 성경을 연구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묵상하고 씨름하며 깊은 진리를 깨달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속에서 흘러넘침을 경험한다. 그 말씀이 나의 사상과 생각을 지배한다. 그 말씀이 내 삶을 다듬는다. 그 말씀이 나의 설교의 내용이 된다.
자주 나의 연약함으로 연구한대로 가르치는 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하며 좌절할 때가 있다. 강단에 서는 것이 때론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 때마다 예수를 바라본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19,24,25절). 예수 때문에 오늘도 산다. 예수 때문에 오늘도 강단에 선다.
성경은 편식하면 안 된다. 성도는 고른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강해 설교를 한다. 성경 66권을 강해 설교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강해 설교를 하다 보면 어떤 본문은 난해하고 설교하기가 어려워 피하고 싶을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고 씨름하며 전했을 때 특별한 은혜를 주실 때가 많다.
신비한 것은 성경은 어느 곳을 펼쳐도 좋다. 어느 장을 펼쳐도 주님은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진리임을 느낀다. 어쩜 그리도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골라서 하시는지 모르겠다.
요즘 스마트 폰의 대중화로 성경도 스마트 폰으로 많이들 본다. 나의 스마트 폰에도 여러 성경 어플이 깔려 있다. 청년들이 예배시간에 스마트 폰으로 성경을 보다가 어른들에게 오해받고 혼나는 해프닝도 가끔 보게 된다.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손안의 말씀으로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대할 수 있는 것은 문명의 축복이다.
그런데 편리한 스마트 폰이 생기고 나서 안 좋은 점은 기억의 상실이다. 지금도 내 번호와 집 전화번호 외에 아내와 두 딸의 전화번호는 기억하지 못한다. 핸드폰이 기억하고 있으니 굳이 기억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도 연결된다.
성경 검색 기능이 스마트 폰에 있다 보니 말씀을 암기하고 암송하려는 노력이 사라졌다. 스마트 폰이 알아서 찾아주니 굳이 머릿속에 기억하려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 부분에 대해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 같다. “그것은 스마트폰 속에 있는 말씀이지 네 마음속에 있는 말씀은 아니지 않니?” 라고 질타하심을 느낀다. 그래서 스마트 폰속에 저장된 말씀이 아닌 내 마음속 내 머리 속에 말씀을 저장하려는 노력을 하려고 애를 써본다.
성경은 우리 삶을 복되게 한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가 가까울수록 목사뿐만 아니라 성도는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그것이 복된 삶이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산 삶만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지나갈 세상, 영광, 자랑, 정욕에 마음과 시간,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의 삶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자기 삶의 모든 행동의 지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 6장 8절의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손목의 기호는 행동의 지침, 미간에 붙여는 생각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인생을 살면서 잠시 멈추고 뒤돌아보아야 한다. 내 삶이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가?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세상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 말씀을 이탈한 삶을 산 솔로몬이 그의 삶을 돌아보며 던진 한 마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이다.
성도는 헛된 삶이 아니라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라질 가치가 아닌 영원히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끝으로, 성경은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던 중세 시대가 암흑기였던 이유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성경에 자신들의 생각을 첨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단도 성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다. 바른 해석이 바른 성경 신앙을 낳는다. 바른 해석이 바른 열심을 낳는다.
오늘날 상대주의와 이성주의는 성경 위에 이성을 올려놓았다. 불건전 신앙운동과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신비적 체험을 성경 위에 올려놓았다.
분별없는 성도는 이들을 따라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다. 유구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바른 신학과 신앙 안에서 성경을 치우침 없이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목사의 책무일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목회하는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삶의 기준삼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