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제자들은 아마 인생의 가장 흥분되는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스승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심지어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겠다며 자신의 못 자국 난 손을 내밀었다.
만져보지 않고는 절대 믿지 못하겠다던 도마를 위한 주님의 배려였다. 그렇게 완강하던 도마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강심장이라도 무덤덤 할 수 있을까? 아마 제자들은 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큰 기대감에 사로 잡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 드디어 시작이다!”
“정말 주님이 살아나셨다!”
“이제 주님과 함께 일어나 가자!”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순간이 찾아 왔구나!”
그렇다! 열 번 스무 번 다시 생각해봐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았기에 흥분하고 감격하고 신이 났어야만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 나라를 만들겠다고 이리 저리 뛰어 다녀야만 정상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증거를 보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요한복음 21장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풀어 놓는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요한복음 21장 3절)
“목사님! 저는 정말 제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아니 낚시가 그렇게 재미있는 겁니까? 목사님이 대신 한 번 대답해 보세요!”
권사님들과 교회차를 타고 심방을 가는데 한 권사님께서 제게 하소연을 하며 질문을 하셨다. 평소에 낚시를 너무 좋아하시는 남편 집사님에 대한 불평을 목사인 나에게 터트리신 것이다.
사실 그 집사님은 나의 낚시 스승이시다. 목사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한번씩 바람도 쏘여야 한다며 본인이 쓰시던 낚시도구들로 세트를 만들어 내게 주신 분이다. 나는 그 집사님을 따라 다니며 소위 말해서 ‘손맛’을 보았고 나도 감히 낚시에 입문을 했다.
오늘 권사님의 하소연은 예사롭지 않다. 권사님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아마 어제 밤에도 뭔 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나는 나의 낚시 스승을 배신하고 나만 살아날 수도 없는 일이다.
정말 난감한 순간에 말씀이 떠올랐다(이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이었다. 나는 너무 심각하지 않게 눈치를 약간 보며 권사님에게 답변을 시작했다.
“(미소를 지으며) 권사님! 예수님의 제자들을 아시지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얼마나 낚시가 좋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그 다음에 바로 낚시하러 갔겠습니까? 낚시가 얼마나 재미있고 좋으면 부활하신 주님보다 낚시하러 간다는데 제자들이 우르르 갔을까요? 성경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도 나오네요(멋쩍은 웃음으로).”
물론 내가 생각해도 잘못된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 위기(?)를 모면할 묘책에도 당연히 미치지 못했다. 권사님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예수님의 제자들은 낚시가 그 사람들 직업이잖아욧!(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나는 더 이상 나의 낚시 스승님을 지켜 드리지 못했다. 그냥 한바탕 웃으며 나 혼자 위기를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나는 요한복음 21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니 정말로 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막 흥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까?”
“아니 왜? 제자들은 그 후에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물고기 잡겠다고 배를 탔을까?”
그 답은 놀랍게도 권사님의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제자들은 낚시가 직업이잖아욧!”
그렇다. 요한복음은 사실 20장 31절로 끝나는 것 같았다.“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요한은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며 사실상 부활하신 주님의 이야기로 20장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 같았다.
그러면, 21장을 왜 기록했을까? 21장은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 양을 먹이라”는 바로 교회와 목양의 사명인 것이다. 이 목양의 사명이 21장에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마 주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 계획 속에는 분명히 교회와 그 목양사역이 포함되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목양의 사명을 받는 현장이 어디인가?하는 문제다. 바로 제자들의 일터였다. 바로 제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직장이 바로 목회가 출발하는 현장이었다.”
선교적 교회는 보내는 교회이다. 교회의 방향은 더 이상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 같이 해외에 또는 오지에 보내는 것은 선교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보내는 것은 선교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상황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수십 년 전만해도 우리는 모슬렘 선교를 위해 비행기를 타야 했다. 또 불교의 나라인 태국이나 힌두의 나라인 인도에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선교사들이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얼마든지 믿지 않는 사람 또 타종교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교회는 성도들을 그들의 삶의 터전, 일터로 보내야 한다. 그곳에서 선교사처럼 살아가도록 교회는 훈련하고 지원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보내는 교회, 특별히 일터로 삶의 터전으로 성도들을 보낼 수 있는 선교적 교회 공동체를 꿈꾸며 웰링턴에 내려온지 이제 2달이 지났다. 우리 이민 1세대는 교회의 방향을 바꾸는데 혹시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분명히 가능하리라는 소망으로 이곳에 왔다.
너무 늦게 온 것일까? 아직도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갈 젊은이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는 가끔씩 아내와 함께 시내에 나간다. 괜히 시내를 걸어 다녀 보기도 하고 또 대학들을 기웃거려 보기도 한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곳 웰링턴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을 선교적 공동체로 세우셔서 뉴질랜드와 또 세계 곳곳에 있는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