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홍시 ‘몽타주’

오랜만에 찾은 한국, 가족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가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하십니다.

“너희 주려고 홍시 얼려놨는데 아빠가 하나씩 혼자 빼먹더라?”.

그랬더니 아빠도 옆에서 한마디 하십니다.

“한 번은 홍시를 빼서 콱 깨물었는데 토마토야.”
“깔깔깔깔깔”.

아빠가 혼자 홍시를 빼 먹는 게 얄미웠는지 홍시 대신 토마토를 얼려버린 엄마. 이렇게 홍시 이야기 하나로 온 가족이 깔깔댑니다.

가을과 겨울에는 어김없이 찾아먹게 되는 홍시. 제가 언제부터 홍시를 좋아했는지, 가만 생각해봤습니다. 기억을 반대로 헤엄쳐 올라가다가 보니 어릴 적 할머니와 홍시 먹던 날이 생각나네요.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물가물 해집니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건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거나, 인상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겠죠. 옛날을 추억하면서 특별했던 한 날을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그날 보고 듣고 만진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리뭉실 희미해지지만, 신기하게 우리가 느낀 감정은 새록새록 올라옵니다.

제가 어릴 적 다닌 유치원의 이름은 ‘가나 유치원’ 입니다. 아침마다 “할~무니~” 하며 할머니와 영영 헤어지는 듯 통곡하며 유치원 버스를 타곤 했습니다. 하루는 유치원 친구들에게 ‘나는 날 수 있다’며 유치원 정글짐의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훅!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런… 나는 동안 볼 일도 봐버렸네요.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날 할머니가 유치원 선생님께‘죄송합니다’ 하시던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우리 할머니가 ‘죄송합니다’ 하시는 모습에 아무말 없이 땅만 쳐다보다가 할머니 손잡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그날의 볼 일’은 한 사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대소변 훈련 중인 나이의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싶지만,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혼내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혼자 시무룩해진 건지, 왜 우리 할머니가 유치원까지 걸어오신 건지, 왜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하는지, 왜 오늘은 집에 일찍 돌아가는지, 그때는 그 이유는 몰랐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눈치는 있었나봅니다.

22년 후 스물다섯이 되어서 할머니께 그날에 대해 다시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그래서 그 뒤로 저 유치원 보냈어요?” 했더니, 할머니께서 저를 가만 쳐다보십니다.

“어린 것이 추운데 벌벌 떨고 있어서 내가 데리고 와부렸지. 다신 안 보냈어. 나랑 집에서 둘이 홍시 노나먹고 놀면 되지” 하십니다. “다신 안 보냈어” 에서 할머니의 화가 느껴지고, “홍시나 노나 먹지” 에서는 할머니의 미소가 느껴집니다.

제가 홍시를 좋아해서 홍시를 노나 주신 건지, 그날이 제가 처음 홍시를 먹은 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매일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홍시를 노나 먹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한 입. 할머니 무릎에서 나도 한 입. 그날의 홍시가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홍시가 특별하게 맛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 무릎에 앉아 할머니께서 주시는 사랑을 먹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그날의 모든 사건은 ‘홍시’라는 한 단어로 마무리가 되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시,‘옛 마을을 지나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찬서리 나무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시의 시작은 찬서리 내린 추운 날이지만 시의 마지막에 남는 건 홍시 하나가 가져다 주는 따뜻함입니다. 벌벌 떨며 굶고 있을 가여운 까치를 위해 감나무 주인이 남겨둔 감 하나에 괜시리 맘이 따뜻해집니다.

겨우내 따뜻한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홍시 먹던 세 살 아이가 자라서 이젠 나무에 남겨진 홍시를 올려다보며 ‘나누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시를 읽고 여운이 끝나갈 무렵, 문득 레위기 말씀이 하나가 겹쳐 지나갑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누라는 하나님 말씀에 “하나님 제가 왜요?” 라고 물으려는 마음을 벌써 아신 하나님은 말씀 끝에 한마디 덧붙이십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마치 “내가 너희에게 나의 아들과 그의 피를 나눴듯이 너희도 그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에 벌벌 떨던 손녀에게 홍시를 한입 한입 떠먹여 주시던 할머니의 얼굴, 추운 겨울 까치를 생각하며 감 나무를 올려다보는 주인의 모습.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후 하늘 보좌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실 예수님의 얼굴이 ‘몽타주’처럼 지나갑니다.

또 어릴 적부터 받아먹던 사랑 한입 한입을 이젠 남들과 나눌 때가 됐는데도 일상에서의 나눔은 왜 이렇게 힘이 든 건지, 오늘도 내 것 하나 더 챙기기에 급급했던 제 모습을 반성합니다.

4월.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합니다. 나뭇잎의 색이 노랗게 변해가고, 가을의 밤송이가 떨어지고 감나무엔 감이 열리는 계절. 우리가 주운 밤과 감을 나누고, 내가 먹던 것을 나누고, 덕담을 나누고 미소를 나누고!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엔 나눌 수 있는 게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묵상하면서 나눌 사랑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받은 사랑을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누게 될 테고, 그럼 손녀도, 까치도, 또 우리 주변의 사람들 모두 조금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겠죠?

우리가 우리 것을 나눌 때에 하늘 보좌에서 예수님이 지으실 미소가 몽타주처럼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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