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선교학계의 화두는 새로운 선교적 대안으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에 대한 이야기가 대세이다.
이슬람의 막강한 성장과 모슬렘 인구의 가파른 상승세와 더불어 선교의 중심국가였던 유럽교회의 둔화, 아니 둔화가 아니라 정체에서 쇠퇴로 가는 조짐, 그리고 한 때는 세계선교 파송 순위 2위로 급부상하던 한국교회는 그 꽃도 피어보지 못한 채 이곳 저곳에서 성장 둔화, 정체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마다 다음 세대를 이을 주일학교와 청년 대학부의 쇠퇴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특별히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도심에서 더욱더 두드러지고 있고 20-30대 중에는 소위 ‘가나안 교인’, 음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 즉 교회를 기피하는 젊은 세대를 이야기하는 다소 냉소적인 표현으로 작금의 교회현실을 말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선교학계의 뜨거운 논의가‘선교적 교회’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선교적 교회는 어떠한 교회를 말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성서의 선교행전인 사도행전 속에 드러났던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분명한 예배공동체로서의 회복이 필요하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예배적 공동체로 존재해왔다.
사도행전 13:1-3의 안디옥교회는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의 분명한 음성을 들음으로 바울과 바나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게 되었고 이는 교회 역사상 중요한 전향적인 시간이었음을 교회사를 통해서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적 교회를 이야기할 때 기능적, 사역적인 측면에서의 논의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성서적 예배공동체로서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그러한 부흥운동이 다시금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존 파이퍼 목사의 이야기대로 “선교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이다” 는 매우 시사적인 선교학적 정의라고 믿는다.
두 번째로, 선교적 교회는 단순히 선교하는, 즉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이유가 선교에 있음을 믿고 천명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회사역의 모든 초점이 선교를 위한 교회 존재 이유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의 목표는 모든 열방으로 보내기 위함이었다(마태복음28: 18-20).
그러므로 교회교육, 교회재정, 교회사역의 모든 분야의 끝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령하는 선교적 초점에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선교적 교회는 기도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와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수많은 9천여 미전도 종족에 대한 선교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전세계의 교회들이 이들 미전도 종족을 위한 구체적인 중보기도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선교적 우선순위와 그리고 영적인 전방개척지역과 그들 안에 있는 민족들, 또 강력한 사탄의 세력을 쫓아 내는 일을 위한 중보기도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로, 선교적 교회는 모든 재정 사용의 우선순위가 선교에 있어야 할 것이다.
흔히 선교한다는 교회들을 방문하면 그들이 일년에 얼마의 재정을 선교에 사용하고 있음을 보고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선교위원들에게 그 예산이 교회 전체예산에 몇 %를 차지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 액수로는 다른 교회에 비해 많은 양일 수 있지만, 교회가 일년동안 사용하는 전체 예산을 생각할 때면 때로는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한국에 오기까지 약 1800년정도가 걸렸다. 주님은 그 오랫동안을 길이 참고 계셨다. 이제 우리가 주의 재림이 임박하기까지 모든 민족 모든 족속으로 갈 때까지 주님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리셔야 할 것일까?
선교는 주의 재림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과 신학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선 선교사로서 바라보는 선교학적 ‘선교적 교회’ 담론은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 담론이 단순한 신학적 논의로 선교학계와 신학계의 하나의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논의로 끝나 버리지 않을까 다소 염려가 된다. 왜냐하면 선교적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성령에 의해 주도 되었던 하나님의 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모든 열방이 주의 구원의 축제에 참여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침체를 겪고 있다. 기도하기는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를 체험적인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그 동안 교회성장과 축복에 가리워져 있었던 성령의 종말론적인 그리고 교회론 적인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성령이 교회에게 향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성령이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심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계시이다.
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일이 교회사 가운데 드러나있다. 마치 신약의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가 큰 대조를 이루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이제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성령의 음성을 듣고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