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에 모인 우리는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었다. 문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 여러 번 확인했지만 그래도 불안이 가시지 않아 다시 한번씩 문들을 확인해야만 했다. 오늘은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렇게 숨어 있다가 발각되는 날에 우리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문들을 걸어 잠그고 세상을 피해 숨어있는 것뿐이었다.
‘그래. 안으로, 점점 더 안으로 숨어들어야만 살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인 우리들은 부활절이 되면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 교회들은 서로 연합하여 부활절 연합 새벽 기도회를 드리고 삶은 계란을 나누며 교회마다 기쁨을 누린다.
그렇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큰 기쁨의 날로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다 부활절기간에는 세상도 덩달아 기뻐한다.
비록 어떤 교회들은 성도들이 여행을 떠나 횡~하니 비어 있지만 대신 쇼핑몰에는 주차할 자리도 없다. 마치 우리 아버지 생신날 옆집 사는 철수가 좋다고 해피버스데이 부르며 뛰어 다니는 기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온 세상에 기쁨을 가져다 준 날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는 부활절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 성경 속의 부활의 날 나타난다.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교회인 제자들의 모습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안으로 숨어 있었다.
이상하게 그것이 처음 교회인 제자들이 인류의 첫 부활절 날에 보여준 모습이다. 아마 이 순간까지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문이 모두 잠겨 있고 두려움에 가득 찬 교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19)
마치 우리가 훗날에 입게 된 부활의 몸을 설명해주시듯이 닫혀 있는 문들과 아무 상관없이 주님이 그 한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다. 공간에 제한을 많이 받지 않는 몸! 닫혀진 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한 없이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의 몸! 아마도 지금의 우리의 몸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몸이 환상이나 허상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인 제자들의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지금 제자들의 눈앞에 서 계신 분이 바로 며칠전 제자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분임을 못 자국과 창 자국으로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이제야 제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돌아가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 나신 것이 눈앞에 증명되었으니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처럼 제자들은 기뻐하기 시작한다. 부활절이 왜 두려움이 아닌 기쁨의 날인가를 제자들이 몸소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일 것이다.
그렇다. 부활은 두려움이 기쁨으로 반전된 날이다. 물론 아직 제자들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우리처럼 온전한 기쁨은 몰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문을 꽁꽁 잠가두고 안으로만 숨어 있는 교회는 뭔가 방향을 바꾸어야 할 순간이 된 것이다.
이들은 이제 어떤 방향으로 모여야 할까? 문을 잠그고 세상과 등진 그리고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있던 교회를 청산하고 나면 교회인 제자들은 어느 곳을 향해야 할까? 놀랍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와 맨 처음 해 주신 말씀 속에 이들의 방향 아니 교회의 방향이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이 장면을 너무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문을 닫고 안으로 숨어 있는 그 당시 교회인 제자들의 모습과 그 한가운데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너시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다.
주님이 맨 처음 하신 말씀은 인사말이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으로 제자들을 안심시켜 주셨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제자들에게 맨 처음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교회의 방향에 대한 말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문닫고 숨어있어야 산다고 믿었던 교회에게 이제 안으로만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보내져야함을 맨 처음에 말씀해 주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붙잡았어야만 하는 교회의 방향이다.
바로 몇 주 전 일이다. 한국 교계에 아주 큰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의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가 수년 전 엄청난 비용을 들여 교회를 분리 개척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주었다.
물론 그때도 말들이 많았다. ‘금수저’ ‘다이아몬드수저’ 니 하는 이야기들로 잠시 떠들썩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버지 목사가 은퇴하자 본 교회에서 분리 개척한 교회와 다시 합병하겠다고 한다. 물론 합병을 통해서 아들 목사를 본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기 위한 꼼수이다.
그것도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이 얼마 전에 세습 금지법을 만들어 발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습이 아니고 합병이라고 우기며 강행한다. 결국 기어이 폭풍을 만들고 말았다. 한국의 교회들은 지금 세습의 폭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세습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세습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사실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가난한 시골교회!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고 몇 명 모이지도 않는 작고 어려운 교회에 아들 목사가 이어가겠다고 한다면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모두 박수를 치며 지지해 줄 것이다.
문제는 세습을 하고 싶을 정도로 거대해진 교회의 모습에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교회의 성공은 대형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한국에 딱 두 종류의 교회만 있다고 말한다. 대형교회가 아니면 대형교회가 되고자 하는 교회 딱 두 교회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도 있고 또 사람이 적게 모이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한쪽이 성공이거나 한쪽이 실패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마음속에 한쪽을 성공이라고 정해 놓고 달려가고 있다.
선교적 교회에서는 이런 교회를 끌어 들이기식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의 목적과 방향이 사람을 많이 불러 모으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교회를 말한다. 어쩌면 오늘날의 대다수의 교회가 이런 잘못된 방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습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된 교회의 방향인가?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교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 교회의 방향을 우리는 다시 되찾아야 한다.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안으로 안으로만 숨으려 했던 처음교회의 모습과 그 한가운데 찾아 오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도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교회의 방향이다.
“교회들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