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나눔과 구제는 필수과목이다

아니, 책이 어디 갔나. 분명히 가방 안쪽에다가 넣어 두었는데…… 6교시 수업을 알리는 타종이 울릴 때까지도 책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6교시는 마침 담임교사의 시간이라서 책의 도난을 신고할까 말까를 고민한다.

어설프게 도난 신고하면 책도 못 찾고 망신만 당하기가 십상이다. 굳은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순간이다. 교실 한가운데 줄 뒤쪽에서 뭔가 전달이 되어 온다. 잠시 후에 내 앞에 전달된 것은 외출 나간 영어참고서이다.

뒷줄에서 손을 번쩍 들어서 사인을 보내 오는 친구가 있다. 키만 멀대처럼 크다고 붙인 별명이 전봇대이다. 아니 저 녀석이 웬일로 내 책을 가져가다니.

2교시를 마친 쉬는 시간이면 도시락의 반은 이미 비웠다. 오늘 점심시간이다. 남은 분량을 얼른 먹고는 가방 안에 고이 넣어둔 영어참고서를 꺼낸다. 책갈피를 빼들고 기본 3형식(주어+동사+목적어)을 노트하면서 읽는다.

유난히 샘이 많은 준이(16세)가 다가오더니 책을 낚아챈다. 어~이거 그 유명한 구문론이네. 너 이 책 어디서 샀냐, 누가 추천했냐, 유명한 책인데 하면서 책을 돌려 줄 생각을 안 한다. 잽싸게 달려가서 책을 빼앗아서 책상 속에 밀어 넣는다.

이 북새통을 놓칠세라 까까머리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무슨 책이니, 소개 좀 해봐. 소위 공부깨나 한다는 범생이들 10여명이 에워싼다. 그냥 지나치기도 그렇고, 자랑도 겸하여 책을 꺼낸다. 책 표지부터 보여준다. 한자체로 영어구문론, 저자는 유진이다.

1960년대에 최고의 영어 참고서로는 구문론이다. 안현필선생의 영어실력기초도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영어 공부에서 가장 시간이 걸리고 가장 올라가기 어려운 봉우리가 있다. 그것은 동사에 대한 연구이다. 이것을 완전히 해치우지 못하면 영어공부는 완전히 실패다.

3대로 내려오는 거지가 없고 3대로 이어지는 부자가 없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이 있다. 왜 이런 말이 있을까? 하나님은 물질을 자신만이 누리고 살라고 주지 않았다. 눈 밝으시고 귀 밝으신 우리 하나님은 경우도 얼마나 밝으실까.

그래 이번만 봐주면 다음에는 착한 일을 하겠지. 이렇게 너그럽게 봐주시면서 2대까지는 지켜봐 주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대 부자는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설적인 부자 반열에 으뜸인 경주의 최부자가 있다. 이 가문에는 9대 진사에 10대 만석꾼으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부자로 유명하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유명한 가훈을 소개한다.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은 네 책임이다.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흉년에 농민들이 먹을 쌀이 부족해서 헐값에 내놓는 농지를 헐값에 사지 말라. 사려거든 정당한 값을 주고 살 수 있을 때 사라는 것이다. 장을 볼 때는 아침 일찍 사도록 하라. 그때가 제일 물건 값이 비쌀 때니까. 며느리는 시집 온지 몇 년 동안은 비단옷을 입지 마라.

이렇게 자신과 가솔들에게는 엄격하였고, 이웃에게는 관대함이 넘쳤다. 최부자와 그 후손들은 만석의 재산을 10대나 유지하고 살 수 있었다. 재물은 만석을 넘기지 말라. 벼슬은 진사를 넘지 말라. 남는 재물은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최부자의 물질관에는 철학이 담겼다. 최부자의 구제와 선행에는 이웃사랑이 촉촉히 녹아 있다. 최부자는 재무관리에도 귀재이다. 자자손손에게 면면이 전해오는 이들의 이웃사랑은 강요된 사랑이 아니다. 오직 조상들의 유훈을 전승하는 가문의 전통이기도 하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이웃사랑을 달고 산다. 노래를 부르고 산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이 흘러넘치는듯하다. 그들 속에 맥맥히 흐르는 사랑은 흘러가지 못한다. 그들의 머리 속에서 지식으로만 남는다. 가슴으로 되새김 되지 못한 교육의 산물들은 뇌에 결정체로 남는다.

사랑으로 용해되지 않은 설익은 지식은 개인주의를 만든다. 의무로 강요된 구제와 나눔은 갑질을 한다. 상처를 남긴다. 이곳 저곳에 트라우마를 만든다. 인색과 무관심과 사랑이 결여된 사회는 회색지대이다.

사랑을 나눌 때 그 사랑은 배가 된다. 인색과 무관심은 나누면 더 이상 인색함과 무관심이 아니고 사랑을 잉태하는 반전의 매개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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