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이 흐르는 거리로 나간다. 한국의 겨울 찬공기를 맞으며 선 양화진 선교사묘역에서 한참을 생각하며 서있다. 이땅에 와서 한 세기가 다가고도 그저 조용히 우리와 함께하신 믿음의 선조들을 본다.
뉴질랜드 여름 따듯한 듯 신선한 아침공기 같은 맑음이 머릿속 기억으로 파고든다. 그 때 함께 해온 오클랜드 청년들과 걷고 뛰던 길을 생각한다. 웃고 떠들던 시간중,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간절한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기도를 ‘산제사’로 올려드리는 매순간을 꿈꾼다. 다시 펜하나 노트하나 들고 거실에서, 거리로 나가본다.
그 분따라 길을 나서며
‘길’이라는 것은 없다가도 생기며 또 어색할 정도로 새로운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곳곳에 참 많이도 있다. 고단하고 마음은 고민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도 가야 할 목적지가 정해지면 우리는 망설임이 있더라도 뒤로하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간다.‘길’이 벅찰 수도 있다.
때론 가기 싫은 곳이 있기도 하다. 물러서고 싶은 곳은 두려움의 길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길도 있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는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다. 그런 길이라면 장님이 된듯 조심히 더듬어서 가야겠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이라도 늘 걷던 익숙한 길은 거침없다.
잘 알고 익숙한 길만큼이나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없다. 우리 주님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것은 그분 걸으신 곳을 잘 살펴보고 배운다면 모든 부분에서 자신감이 생기는 유익이 있다.
어느 싱어송라이터의 시처럼 속고 속이는 Crooked World에 Crooked man으로 세상 무너질 것 같은 오늘을 위태하게 살아가고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 있다면 다버리고 가지 않겠나.
그러나 그 확실한 길이 살기 위한 길인데, 죽어야 산다는 역설을 하시며 걷고 계시는 그분의 말씀이 심오하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기로 했다.
여행다니듯 길에 서다
예수님은 1세기 유대아 지역과 사마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인류의 구주로 길을 나서시고 사랑으로 이땅에서 하늘을 구하며, 의를 이루며 살라고 우리에게 걸어 갈 그 길을 알려주셨다. 우리 살길을 열어주심이 분명하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정치와 경제와 시대의 문화가 헛된 세속에 휩쓸려 갈때, 3년 6개월 지나 피로 쓴 예수님의 시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도 담겨있어서 영원히 우리에게 살 용기를 주신다. 법률도 어그러진 것 같은 시대에 이기적 판단만 내리고 이것이 정답이라 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믿음만이 살길이라 말씀하신다. 이러한 역설을 삶으로 옮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사랑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안식이라는 수고의 보상이 되고, 빼앗고 노략한 이들에게 죽음은 절망과 공포의 심판이 된다. 악착같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이기심만을 따라 살아온 이들은 죽음이 망하는 것이어도 나누고 배풀며 살아온 이타적인 이들에게는 죽음이 위로와 의인을 잃게 된 사랑의 애도와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온다.
의인의 죽음은 생명을 낳아도 악인의 죽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면 저기 길거리에 버려져 밟히게 될 심판의 무게를 어느 누가 감당하랴. 이와같이 살면서 구주의 길처럼 확실한 길이 없다. 그리스도를 알아도 자신의 부만을 쫓는다면 필경 망하리라. 영원히 이땅에서 살것이라면 여기에 쌓고 쌓아 더 많은 권력과 학위와 명예, 부귀를 쌓아가는 것이 답 아닌가 하지만, 무엇이 정답인지 혼돈하고 유리하는 젊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이야기하고 싶구나.
크리스마스 풍경과 도산 안창호
그 길이 맞다고 하고 걷다보면 다시 세상 풍조가 나날이 달라져서 내 마음도, 생각도 흔들리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니 그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라고 고백한 시인의 고백은 참으로 놀랍다.
또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라고 말한 안창호선생의 말은 나를 돌아보아 심히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제자들은 또한 어떠한가.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서 태어나서 무엇에 사로잡혀 죽음을 불사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어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죽는 것이 사는 목적인 그들의 삶은 도대채 어떻게 가능한가가 끊임없이 나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자, 새가 둥지를 틀고 머리 위에 앉았다.
그렇게 싫지만은 않아서 그 둥지에 앉은 새와 함께 지내기로하고 그 새가 날아온 곳, 도산 안창호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압구정 한복판, 크리스마스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듯 상술의 흰 눈이 아닌 마른땅 비가 촉촉히 내린 날 근린공원으로 향한다.
도산의 길을 걷고싶어 가는 길, 멋진 의상 모델들과 럭셔리 컨버터블들이 줄줄이 서있는 곳을 지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카페에 들떠있는 젊은이들과 그들이 모인 곳 분위기가 눈길을 빼앗을 만큼 참 분주하다. 이것이 좋아서 가는 것은 이미 20대에 싫증이 났다.
대형 백화점의 상행위는 상업에 찌든 이들의 간절한 몸부림이라 맘에 두지 않고 지나칠 때, 그 사이사이로 인간미 넘치는 생각깊은 상점 점원의 친절함과 따뜻함은 삭막한 정서에 단비와 같다. 그 친절함에 그리스도가 있는가 싶어서 가만히 보다가도 갈길을 서둘러서 간다.
근린공원 인근 교회 카페. 삭막한 도시 곳곳에 상업적이고 숨막히는 물질주의와 번영, 성공 중심의 맘모니즘을 뚫고 생명을 이야기해줄 이들이 보인다. 그렇게 발길을 재촉해서 저기 도산이 서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보니 역시 그 분의 살아있던 곳의 흔적이 마음으로 하나씩 걸어 들어온다. 갈 때마다 매번 생각하지만, 오기를 잘했다.
선생님의 책장과 계셨던 곳의 흔적들을 담은 모습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타인을 사랑하라는 ‘애기애타’로 나의 걷고 있는 길을 격려하고 또 흩어진 마음에 도전하신다.
주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특히 갈 곳 없이 버려진 한국인들과 핍박받는 이들에게 보이려고 온 생명을 다한 그가 너무 좋아 한동안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본다. 그의 또렷한 눈동자도 그러하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온몸으로 이뤄 새로운 삶의 길에 뿌린 도산 안창호선생님으로부터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고 돌아나오는 길 다시 떠나는 나에게 이야기하신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땅에 이르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도산의 삶에 관철되고 결국 그 나라와 이웃을 위해 이렇게 이해된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우리 이길 위에 서 있네
우리의 걷는 걸음이 비록 보잘 것 없어보여도, 힘없고 능력없는 매우 미약한 걸음 같아 보여도 잊지 말아야한다.
우리의 걷는 이 주님가신 길은 결코 헛되거나 미약하거나 의미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 3년 6개월의 피로 쓰신 시는 혼란과 의심과 염려에 쌓여있는 이들에게 생명과 소망과 사랑을 먹게하고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걷게 할 중심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는 오는 세대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능력과 힘과 소망이 되시며 믿음으로 희망하여 나아갈 결국이시다. 함께 걸어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