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

일식은 달이 태양을 가려 일시적으로 지구에서 태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빗대어 ‘하나님의 일식’은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의가 가득하고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며 힘없는 백성들이 신음 속에 고통 당하나 악에 대한 보응이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이 세상에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악을 행하기에 담대해 진다. 모든 것을 드러내어 심판하실 전능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 신앙인마저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공의롭게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제 받고 억눌림 당하는 이들의 억울함과 탄식을 신원(伸寃)하시는 공의로운 재판관으로 이 땅을 다스리신다.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시편 89:14) 비록 그 심판하심이 더디고 지체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지금 한국사의 암울하면서도 역사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도했고, 교회는 힘들고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던 곳이었다. 비록 지금 대한민국이 몸살을 앓고 있지만 하나님의 크신 뜻 안에서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에 벌어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시대의 징표이기도 하다. 정치와 세상을 보는 시각은 한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반영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볼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라 믿으며 다만 지금이 한국사회를 정의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이 시대의 십자가임을 고백한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이 우리 민족을 일제에서 해방시키시고 전쟁과 독재에서 구하셨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우리는 앞으로 오로지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행할 것을 다짐하여야 하리라.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은
에스더서는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에서 유대인의 삶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으로서 페르시아 왕비가 된 에스더와 유대 백성들은 아말렉 후손 하만이 등장하면서부터 탄압과 고통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 장면에서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꿇어 절하기를 거부한다. 모르드개도 페르시아 왕궁의 관원으로서 일했기에 궁중의 법도를 모를리 없다. 그렇다면 왜 모르드개는 왕이 임명한 총리에게 신하로서 마땅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이때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어 밝히는 모르드개의 저의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에스더 3장 1절“그 후에”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아하수에로가 정책 변화를 시도한 계기는 에스더 2장 21-23절에 묘사된 왕 암살 미수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르드개의 제보로 암살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했지만, 그 암살자들은 왕이 신뢰하던 최측근 내시들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아하수에로 왕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더 이상 측근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권력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구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하수에로가 선택한 방법은 한 사람에게 국가의 전권을 부여하여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은 듣기 싫은 반대 의견을 듣지 않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모두 2인자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이 일에 적임자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하만이다. 일곱 지방관 중 하나도 아니고, 일곱 측근 가운데 하나도 아닌 하만을 선택한 것이다. 하만은 후궁전을 책임지던 자였다.

에스더 3장에 나타난 아하수에로와 하만의 모습을 보며 현 대한민국의 시국이 오버랩 된다. 하만이 2인자로 등극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정부는 다양한 이들의 조언을 듣고 국사를 결정하던 질서있는 나라였다. 에스더 1장 10절과 14절은 이들 신하들의 이름이 일일이 나열되고 있다. 이전에 왕은 국사의 문제를 현자들에게 묻곤 하였다. (에스더 1:13)

왕비 와스디의 처분에 있어서도 므무간이라는 일곱 지방관 중 가장 서열이 낮은 자가 왕에게 조언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었다. 한마디로 하만이 등극하기 전 페르시아 정부 체제는 다양한 전문가들과 신하들의 언로가 열려있는 소통이 잘 되는 체제였다. 하지만 하만이 등장하면서부터 신하들이 국가를 위해 왕에게 소신 있게 조언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고 이 후로는 왕궁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2인자 하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뿐이었다.

에스더 3장 이후부터는 하만 이외의 다른 신하들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직 하만과 그의 의견만이 언급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변화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사적 감정이 들어간 그런 광기 서린 정책이 왕의 조서를 통해 합법화되고, 한 민족을 말살하려는 복수극으로 치닫게 되는 불의한 시대의 공권력 그 불의 앞에 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받을 나의 성적표는
2016년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개인이든 교회든 한 해를 마감하고 결산해야 하는 자리에 다시 선 것이다. 올 한 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린 어떤 삶의 성적표를 받게 될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회들을 어떻게 사용했나.

마치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때론 권력에 붙어 그 힘을 누리려 하고 모든 보상과 칭찬을 이 땅에서 받아야 한다고 몸부림쳐온 시간은 아니었는지. 비록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가장 낮은 자로 다시 서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일식 넘어 영혼의 어둠이 지나는 그 곳에 공의로운 심판자 되시는 그 분이 계심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목양이야기를 쓰면서 나 자신의 목회 여정과 목회자로서 살아왔던 모습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표현 된 글 가운데 혹시라도 과장 되었거나 부풀려 있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부족함과 겸손치 못함이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꾼으로 매 순간 나아가길 소원하며 오늘도 나를 주의 종 삼아주시고 목양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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