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사량(思量)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모든 일에서 효율성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마치 닳아버린 엘리베이터 닫기 버튼처럼, 조금이라도 빠르고 편한 길을 찾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 되었고, 모두가 그 길을 따라 살다 보니 그것을 문제라 부르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우리가 모여 교회를 이루다 보니, 섬김과 헌신의 자리에서도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효율성 위에서 다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제직회에서 예산안을 짜거나 행사를 계획할 때, 목자를 세울 때, 준비한 것이 제대로 이뤄질지, 목장이 지속될지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사실 문제될 것도 없다.

다만 오늘날 교회 안의 여러 갈등을 들여다보면,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효율적인 길을 붙잡고, 상대의 길을 부정하며 부딪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 가지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를 죽이고 새 인류를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까지 심판하여 아담의 후손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기다리고 인내하시다가 결국 아들까지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셨을까? 지금 당장 오셔서 심판하시는 대신, 인간의 범죄함과 성도들의 원망까지 들으며, 굳이 기다리시는 이 비효율적인 모습을 하나님은 왜 지금도 보이고 계시는 걸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돌아보면,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이는 오늘날 세상과 성도들이 추구하는 효율적인 삶과 신앙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길로 보인다.

어쩌면 주님이 말씀하신 넓은 문은 세상 모든 사람이 따라가는 이 ‘효율성’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중심에 두고 가장 빠르고 쉽게 이득을 얻는 길이 넓은 문이라면, 그 반대편, 극도로 비효율적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님의 발걸음이 바로 좁은 문이 아닐까? 주님은 왜 그 비효율성의 극치를 감당하셨을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4절, 새번역)

‘내 어린 양을 먹이라’&‘부자 청년’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공연을 올리기 3주 전쯤, 한 리허설에서 주연 배우가 별다른 언급 없이 한 시간 늦게 온 적이 있다. 리허설마다 30분 단위로 배우들의 연습을 준비해 왔는데, 배우가 늦으니 속은 타들어 갔지만, 계획에 없던 다른 장면들을 먼저 진행했다.

배우가 도착했을 때, 계획대로 다음 장면을 갈지 아니면 그 배우의 장면을 다시 연습할지 선택해야 했는데,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는 판단 속 지나버린 장면의 연습을 진행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그 선택으로 예정되어 있던 다른 장면들의 연습이 밀려버렸고, 거의 두 시간 반을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린 배우들이 생긴 것이다. 연습이 끝날 무렵, 한 배우는 곧 학교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데 세 시간 가량을 의미 없이 보냈다며, 리허설의 비효율적 운영에 불만을 표했다. 소리를 높이거나 거친 표현을 쓴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정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은 어느 순간보다 깊이 내 마음을 찔렀다.

만약 리허설 스케줄이 얼마나 세심하게 관리되어 왔는지, 그리고 오늘의 비효율은 사실 다른 배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다면, 나는 유능한 연출가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찔렀던 그 날카로운 말을 늦었던 배우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셈이었고, 두 배우의 관계가 나빠지고 결국 둘 다 팀을 떠나게 될 것이 눈에 보였다. 그렇기에, 공연을 올리고자 하는 대의 속에서, 억울함과 답답함을 속으로 삭이며 모든 불만을 나의 부족함으로 덮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억울함과 답답함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위로 받기도 했지만, 적잖은 부분은 사람을 향한 쓴뿌리로 남기도 했다. 여러 사역들을 진행해갈 때마다 상황의 일부만 아는 사람들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들을 주장하며, 전체를 보아야 하는 나에게 불만을 표하고 자기주장을 관철하려 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 사역과 함께하는 팀을 깰 수 없어, 여러 불만들을 나의 무능함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키를 내어주며, 진행하는 사역의 목적을 지키는 데에 의미를 두었었다.

네 번의 뮤지컬 공연을 올리는 동안에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었고,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은 내 본성은 큰 대의 앞에 눌러둔 채 참고 인내하며 버티는 시간이 많았다. 늦는 사람에게 바로 연락하고 싶고, 대사를 못 외운 배우에게 “반드시”라는 말로 다그치고 싶은 마음도, 그 배우나 연주자, 스태프가 불만 속에 팀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 순간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반복되어 온 답답함과 나 스스로에게는 비효율적이었던 인내와 버팀이, 네 번의 공연을 지나 다섯 번째인 ‘부자 청년’에 이르러, 마치 거울이 되어 다른 모습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리허설이 시작된 지 최소 2주가 지나면 배우들이 대사를 외워 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었다. 바쁜 학교생활과 직장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변함없이 참아보던 중, 각 배우들의 사정이 점점 더 깊이 눈과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리허설의 중반 쯤 배우들에게 받았던 기도제목들 속에서, 왜 이 배우는 “웃음이 많게 해달라”고 적었을까, 왜 저 배우는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였을까 깊게 헤아리기 시작했다. 또한, 대사를 못 외우던 한 배우의 대본을 우연히 보았을 때, 계속 틀리던 부분에 “제발”과 “멈춰”라는 단어가 크게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왠지 그것이 마음에 화인처럼 길게 남았다.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알고 있었다. 대사를 못 외우는 배우에게 강하게 말하거나, 어린 배우의 부모님께 직접 말씀드려 연습을 강조하면 다음 리허설까지 금세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효율성을 택하는 대신 반복되어온 나의 비효율적인 기다림은, 배우들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고 헤아리게 만들었다. 단순히, 뮤지컬 팀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기다림이 아니라, 오래 말을 나눠보지도 못한 배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고 있는 나 자신을, 그 비효율적 인내의 거울이 비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한국어는 순 우리말이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이 단어가 ‘사량(思量, 생각할 사·헤아릴 량)’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것이 실제 사랑의 어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편안함과 효율성의 가치를 무시함과 동시에 비효율적인 자리를 지키게 하는 이 단어 ‘사량’은, 사랑의 의미를 이미 품고 있는 듯하다.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이 로마 시대 가장 비천하고 수치스러운 자리로 들어가신 그 발걸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길이다. 나였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보다 나를 더 깊이 생각하셨고, 허망하게 살다 죽을 나를 헤아리셨기에,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는 대신 나를 사랑하시고 ‘사량’하시어 그 길을 걸으셨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효율성을 추구하며 넓은 길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사랑과 ‘사량’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비효율적인 길을 이해하지도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억울함과 답답함 속 어떠한 효율성도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으로 그 좁은 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주님께 성도라 인정받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그 사랑과 ‘사량’을 받은 나 또한, ‘부자 청년’ 뮤지컬의 모든 연출진과 배우, 연주자, 스태프들을 더욱 ‘사량’하고 사랑하길 원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 8편 4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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