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화요음악회를 추억하며

화요일 아침이다. 뉴질랜드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와 삶의 둥지를 튼지 벌써 삼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화요일이 되면 가슴 속 한 귀퉁이가 아련해지며 옛 생각이 난다. 화요음악회를 사랑하셨고 아직도 화요음악회를 기억하고 계실 분들을 위해 전에 써놓았던 이 글을 올린다.

화요일은 일주일 중에 제일 바쁜 날이다. 저녁에 화요음악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3년 전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음악 감상 모임이 벌써 해를 몇 번 넘기면서 어느덧 120회가 되었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빠짐없이 모여 정담도 나누고 클래식 음악도 감상하다 보니 자연스레 모임의 이름이 화요음악회가 되었다.

좁은 이민사회(移民社會)에서는 소문도 빨라 이곳 오클랜드(뉴질랜드의 도시)의 교민 중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점점 더 많이 오셨다. 찾아오는 모든 분을 환영하며 우리 부부가 오클랜드에 있는 한 화요일 저녁 7시엔 우리 집 대문은 음악을 좋아하는 모든 분께 항상 열려있다고 말씀드렸다.

오시는 분들께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어 화요일 아침이 되면 그날 들어야 할 음반과 CD도 찾고 또 나름대로 해설을 위한 원고도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날도 아침 식사 후에 음악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날 들을 에드워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판을 찾다가 우연히 서가에 꽂혀 있는 음악 잡지에 눈이 갔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가서 꺼낸 잡지가 91년도 판 ‘스테레오 음악’이란 오디오 잡지였는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 옛날 내가 기고했던 글이 보였다. 그때, 한창 오디오와 음악에 빠져들었던 시절에 잡지사 기자의 청탁으로 썼던 글인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옛 생각이 나며 감회가 깊었다.

별것 아닌 글이었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이 낯선 땅 뉴질랜드에서 어느 날 갑자기 화요음악회란 모임을 만들 마음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지난 시절이 그리워지기 마련이지만 그 아침 그 글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그 시절이 그리웠다.

이제 다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엔 지금 화요음악회에 오시는 분들을 비롯해 이곳 뉴질랜드에서 만나 타국 삶의 애환을 같이 나누었던 분들이 가슴이 아프도록 그리워질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아련한 느낌이 퍼져 나와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먼 훗날 그분들과 같이 오늘을 돌아볼 수 있도록 이 글을 공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용기를 내서 ‘1991년 STEREO MUSIC’ 잡지에 실렸던 글을 여기 그대로 올린다.

음악,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서
보들레르의 시(詩)에 ‘여행에의 초대’라는 시가 있다. 베버의 ‘무도에의 초대’라는 음악에서 힌트를 얻어 제목을 붙였다는 이 시에 후렴으로 나오는 구절이 다음과 같다.

그곳은 모두가 질서의 아름다움,
호사(豪奢), 고요 그리고 쾌락.

시인이 이 시에서 꿈꾸는 그곳은 미지의 어느 나라이겠지만 나는 그곳을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니, 이 시의 제목부터를 ‘여행에의 초대’가 아니라 ‘음악에의 초대’로 바꾸고 싶다. 음악,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초대되어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그곳에서 우리는 시인이 노래하는 질서, 미(美), 풍요로운 호사, 고요, 쾌락, 이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흐의 거의 모든 음악에서 나는 질서를 느낀다. 바흐 스스로가 음악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조화된 좋은 소리’라고 하였듯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치 잘 정돈된 유럽의 어느 도시를 한적하게 걸어가는 분위기에 싸여 반추할 수 있는 삶의 질서를 깨닫는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내 삶을 반성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미(美) 그 자체다. 서른다섯 살의 짧은 인생을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는 인생의 깊은 슬픔을 소리 속으로 뭉뚱그려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펼쳐낸다.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속에서 매번 나는 그의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심성(心性)과 만난다. 하프는 봄날 아침의 들안개처럼 퍼져나가고 플루트는 한줄기 햇살마냥 솟아나 주거니 받거니 노래하면 그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나는 이미 나를 잃어버린다.

번잡한 삶의 소음을 떠나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싶을 때 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3악장 ‘들녘의 정경’을 듣는다. 여름, 노을 진 들판에서의 목동들의 이중주, 오보에와 잉글리시 호른이 흐느끼듯 속삭이며 주고받는 소리의 고요, 비록 잠시 뒤에는 깨어질 수밖에 없는 고요이지만 잠깐이라도 나는 그 속에서 부질없이 흘러가는 내 인생의 앞뒤를 가늠한다.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 1악장은 음(音)이 빚어낼 수 있는 호사의 극치를 내게 전해준다. 알레그로 비바체의 빠른 힘 속에서 튀어 오르듯 울려 나오는 목관, 금관, 현악의 울림 속에서 지중해의 따뜻한 태양, 남유럽 사람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묻어나오면 나는 시인 보들레르가 꿈꾸는 호사와 멘델스존이 음악 속에 엮어내는 삶의 환희가 서로 교감함을 느낀다.

오디오란 이 좋은 세계 ‘음악에의 초대’에 갈 수 있기 위한 초대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초대권이란 그것이 가치 있는 초대일진대 초대받을 자격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권리이다. 따라서 돈만으로는 이 ‘음악에의 초대’의 초대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오디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음악을 듣기 위한 가슴을 열어놓고, 그 음악을 듣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오디오는 비로소 진정한 ‘음악에의 초대권’이 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 기기라는 협의의 오디오에 관한 한 나의 편력은 대단한 것이 못 된다. 60년대 말 대학 시절 고전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한 뒤 열심히 아르바이트 하여 별표 전축을 마련했을 때의 기쁨, 부지런히 청계천을 뒤져 복사판을 사 들고 와 밤새 숨죽이며 듣던 열정,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음악을 들어도 눈살 한번 안 찌푸리던 학교 앞 학림다방의 주인 아주머니. 아름답기만 한 이러한 추억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랴, 취직하랴, 장가가랴, 그리고 새로 시작한 사업에 전념하랴…… 그만 멀어지기만 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가정도 사업도 안정이 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음악을 듣기 위한 최소한의 나만의 공간이 확보되었을 때 오디오계의 권위자인 친지 K씨의 조언에 따라 내가 마련한 첫 오디오가 굿맨 스피커에 쿼드 606 파워 앰프, 쿼드 44 프리 앰프, 쿼드 FM4 튜너, 그리고 소니의 CD 플레이어였다.

세팅이 끝나고 처음으로 요요마가 연주하는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들었을 때의 그 감격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에이징도 안 된 굿맨이 내면 얼마나 좋은 소리를 냈을까 마는 그 부드러운 첼로의 소리는 내겐 분명 천상의 소리보다 아름다웠다.

집을 이사하고 음악에의 내 공간이 넓어지자 나는 그에 걸맞은 스피커의 필요성을 느껴 타노이의 캔터베리 15를 내 오디오에 추가하였다. 한결 부드럽고 폭넓은 음의 세계에 젖어 들어갔으나 얼마 뒤 나는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좀 더 끈적거리며 뻗어 나오는 음에 대한 욕망에 못 이겨 마란츠 7과 퀵실버를 잇는 진공관 앰프와 토렌스 AD 플레이어를 들여왔다.

음반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가을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발그레 수줍어지는 진공관의 불빛을 마주하고 음악의 세계로 빠져들어 갈 때에 나는 곧잘 미국의 여류 시인 밀레이의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서’라는 시의 두 구절을 떠올린다.


‘감미로운 소리, 오 아름다운 음악이여, 그치지 말아다오
다시는 나를 세상 속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다오’

얼마나 음악 속에 도취되고 또 그 도취된 순간을 사랑했으면 시인은 세상 속으로 돌아오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것일까? 음악,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 무엇이 시인을 잡아 끌어 보이는 이 세계로의 귀환을 마다하는 것일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몰아치며 횡행하는 이 황량한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양 그것에만 집착하여 매달리는 사람들의 틈바귀에서 벗어나 음악,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 끝없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미 내 손에는 이 아름다운 세계에의 초대권—오디오—이 주어져 있지 않은가? 주어진 이 초대권의 자리가 B석이든 A석이든 혹은 R석이든 그 위치에는 너무 연연하지 않겠다. 오히려 앉은 그 자리에서 가슴을 활짝 열고 귀를 곧추세우고 음악을 제대로 들어 바르게 느끼고 이해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해한다는 것은 동등해짐을 뜻한다.’라는 라파엘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열심히 들어 이해할 수 있으면 언젠가 나도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음악가들과 동등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_1991년 가을 씀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