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1980년 3월 영국인 노총각이 한국에 왔다. 뒤늦은 장가를 간다고 그의 직장 뉴질랜드 포스트 뱅크에 3개월의 휴가를 얻어, 생전 처음 가 보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 한국! ‘6·25 동란 당시 들었던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 하나님이 버렸다는 나라,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그 당시는 뉴질랜드와 우리나라 간 직항 노선이 없었다. 그래서 수도인 웰링턴에서 싱가포르나 일본을 거쳐야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비 신부, 경숙이란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서로 만난 적이 없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궁금하다. 그렇다고 초면에 자세히 물어볼 수도 없다. 새신랑 로이는 그래서, 모든 걸 경숙이네 측에서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고 각오(?)하게 된 것 같다.
숙소도 고민, 식사도 고민
결혼 절차가 아무리 빨라도 3개월이 걸린다고 하여 로이는 약 3개월 간 서울에 있을 계획을 세웠다. 영어를 잘 하는 제부와 함께 어떤 숙소 에 그가 머물러야 하는지 신부
네 측인 우리 식구들은 고심하며 대책회의를 했다.
호텔과 여관, 여인숙. 무궁화 다섯 개짜리 외국인용 호텔(비용이 여관의 10배쯤 비싼 곳)을 놓고 고민했다. 여관은 저렴하지만, 침대가 없어 서양 사람에겐 불편할 것 같아
가격이 비싸지만 그에게 어울릴 것 같은 외국인 전용 무궁화 다섯 개짜리 호텔을 권했다.
그 당시 뉴질랜드 공무원 월급이 얼마인지 알 리 없는 우리 측은 서양 사람들에겐 그 정도의 비용은 큰 부담이 아닌 줄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게 낯선 나라에 와서 뉴질랜드 키위 총각 로이! 그가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매일 사 먹어야 하는 음식도, 요즘처럼 맥도날드나 KFC도
없었으니 서양식이란 경양식 집이나 가야 함박 스테이크, 돈까스를 맛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음식들은 값이 한식보다도 많이 비쌌으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
연스레 주변의 한국 음식을 안내하곤 했다.
육개장과 설렁탕, 구두닦이 서비스
그날따라 나는 매콤한 육개장이 먹고 싶었다. 자세히 영어로 설명하기도 어려우니 묻지도 않고 육개장 두 그릇을 시켰다. 보글보글 빨갛게 양념되어 먹음직스럽다. 아마도 그는 ‘저렇게 뜨겁고 매운 음식을 어떻게 먹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그때 로이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먹겠다’라고 스스로 다짐했을 것이다.
연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범벅이 된 그가 한 그릇을 다
비워 갈 즈음, 저만치 주방에서 반쯤 커튼을 젖히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 육개장을 요리해낸 주방장이었다. 키 큰 서양 남자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저 서양 남자가 매운 육개장을 먹어낼까?’ 심히 걱정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먹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로이는 오히려 이 뜨겁고 매운 육계장으로 막혔던 코가 확 뚫렸다고 말했다.
이제 로이는 한국식의 국, 탕 같은 음식에 조금씩 익숙해졌을까? 그 다음날, 이번에는 설렁탕을 먹어 보기로 했다. 따끈한 설렁탕을 맛있게 먹고 나와보니 방문 앞에 벗
어 놓았던 그의 구두가 안보인다. 경숙의 구두는 그대로 있는데, 왜 하필 로이의 구두가 없어진 것이다. 큰일 났다.
걱정하고 있던 순간, 어느 소년이 다가온다. 분명히 로이의 것인 갈색 가죽 구두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구두닦이 소년 왈, “손님 구두 반짝반짝 닦아 놓았어요. 구두가 보트만큼 커서 구두 약이 두 배나 더 들었어요. 닦은 값 두 배로 주세요.” 로이는 태어나서 그 때까지 단한 번도 자기 구두를 다른 사람이 닦아준 적이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영국이나 뉴질랜드에는 구두닦이라는 직업이 없었던 것이다.
난생 처음 받아본 구두닦이 서비스! 느낌이 색다르고 특별했단다. 한 켤레 밖에 없는 필수품 구두가 갑자기 없어 진 줄 알고 깜짝 놀랐던 마 음을 쓸어내린다. 이것이 한국
의 문화인가? 이상한 나라네…. 반들반들 윤기 나는 구두를 신고, 서울 거리를 걷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
훗날 한국인들이 그에게 가끔 묻는 질문이 있다. “한국 체류 2달 동안 무엇이 가장 인상깊고 흥미로웠나요?”
남대문시장 구경이 가장 재미있고 신기했다고 회상한다. 시장 바닥에 산더미같이 쌓아 놓은 셔츠 옷 더미 속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골라 골라 500원, 500원”을 외치던 소년의 모습이 너무나 흥미로웠다고(아마도 그 소년이 살아 있다면 70대에 가까운 나이 일 것 같다.)
그 다음 골목길에 갔을 때의 바라본 풍경
평소에 그가 보아왔던… 쇠고기 보다 조금 더 붉은 색을 띠는 저 고기가 무어냐고 물었다(조금 후에 그것은 바로 개고기였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두근두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별히 또 한가지 너무나도 신기했던 기억은 목이 잘린 삶은 돼지 얼굴을 진열대에서 봤을 때란다. 돼지 얼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꼭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놀
라웠고 신기하였다고 회상한다(kiwi들은 돼지 머리 고기는 먹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었던 돼지가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장인 장모의 예비사위 2차 테스트
“나라 국(國)자를 붓글씨로 써보라!”
결혼식이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와, 예비신랑 로이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물론 우리 집의 구조 역시 온돌식인데, 그가 방 바닥에 앉는 것을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우리
식구 중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날도 부모님은 예비사위를 내심 이리저리 뜯어보고 재보고 계시다가, 아버지가 먼저 그에게 묻는다. “직업이 나라 밥 먹는 공무원이라고 했지?” 그리고는 남동생에게
하얀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공무원이라니까 여기다가 나라 ‘국(國)’자(字)를 한자로 써보게.”
남동생과 나는, 그가 아마 ‘국(國)’ 한자를 모를 거라고 아버지께 조용히 귀띔해도 아버지에겐 그 말이 안 통한다. 당황스러운 로이!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No’라고 할
순 없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아버지는 다시 남동생에게 주문을 한다.
옆에 있던 엄마는 눈치가 3단이다. 아버지 앞에서 쩔쩔매는 로이가 조금 안쓰러웠나? 분위기를 바꾸려고 엄마가 하시는 말씀!
“아이구, 시상에. 넘의 나라에 와서 월매나 고생이 많은가 말여, 먹는 것도 션찮을틴디. 즈덜 나라서는 고기반찬에 잘 먹구 살았을 틴디. 그러구 이제 한국 나와서 며칠 됐
다고 내 소리를 알아듣는다야. 귀 털구 알어들어. 귀가 뚫렸나벼. 다 사람 살기 매련이여.”
영어로 ‘Sorry’의 뜻을 모르는 엄마다. 아버지의 질문 공세에 뭐가뭔지 당황스럽고 미안해서 ‘Sorry, Sorry’를 연발했던 로이의 말을 엄마는 당신식으로, ‘소리’를 잘 알아 듣는다…. 로 나름 해석을 하신 것이다. 훗날에도 아버지는 신기하다고 하시며, 종종 “느 어머니는 로이랑 참 말이 잘 통한다.”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엄마와 로이의 대화는 이와 같다.
엄마: 별일 없는가?
Roy: I have a cat.
엄마: 자네 식구들 모두 건강한가?
Roy: Today is sunshine.
엄마: 잘 있다니 다행이네 그려.
Roy: Yesterday was raining.
엄마 : 뉴지란도는 날씨가 워뗘?
Roy: I have a dog.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막힘없이 술술술 로이와 얘기 잘 하는 엄마를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다.
동갑내기 사위를 본 엄마는?
어느 날 혼자서 호텔에 있을 로이가 심심해할 것 같아, 호텔에 엄마를 오시라 했다. 엄마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로이와 말동무 하세요.” 하고 나 혼자 볼 일을 보러 나
간 적이 있었다.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로이와 엄마는 의사소통에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벼루와 먹, 붓, 더 큰 종이를 내어 오너라. 작은 종이 보다는 큰 종이에 쓰면 더 쉬울 게다.”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는 동생은 어디선가에서 그 물건들을 또 다 찾아 내온다. 나는 아버지의 주문 사항을 제대로 통역하기 어려웠고, 남동생도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간다. 아버지는 다시 로이에게 글씨를 쓰라 한다. 국가 공무원이면 적어도 나라 ‘국(國)’자 정도는 기본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식 신념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당신이 영어를 모르기에 오히려 서양 사위 앞에서 본인이 잘 아는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심정은 아니었을까? (장인으로서의 패기?)
그런데 오후가 되어 호텔에 돌아와 보니 이미 엄마는 가고 안 계셨다. 로이에게 엄마랑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아라비아 숫자와 년도가 쭉
~ 쓰여 있는 조그만 책자와 잣대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1900년도부터 1901, 1902, 1903… 손과 잣대를 짚어가면서 그대로 따라하라고 시켰다고 한다(엄마표 식 나이 알아내기).
아하! 생년월일? 로이는 나이를 묻는 거라고 짐작했다(눈치로). 1932. 8. 15 일에 손가락을 짚었다고 한다. 나이든 뭐든 평생에 자신을 속여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당연
했던 것이다.
본인은 “내 나이가 어때서” 유행가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부모님께 그의 나이를 서른둘이라고 속여 말한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 당시 한
국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나이 차이가 20년이란 것이 쉽게, 아니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회적 풍습이 서로 나이가 비슷하거나 3~4년쯤 신랑
이 위인 것이 좋다고 했으니까(한국 남자들은 군대를 가야 하니까).
그로부터 42년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엄마는 나에게 그의 나이를 두 번 다시 물어본 적이 없다. 물론 나도 엄마에게 사실대로 그의 나이를 말 한적이 없다. 엄마는 자신
과 동갑내기 늙은 사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꿈에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나이 차, 20년…?.! 그날 로이의 나이를 알고부터 엄마가 받았을 충격은 감히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 딸이 뭐가 모자 라서? 이렇게 늙은 사람과? 엄마의 침묵 속에 담긴 놀람과 당황, 충격을 나는 이제껏 전혀 풀어드리지 못하고, 어느새 속절없이 세월만 지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