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한국에서 안식년 후 인도 사역

필자 부부는 1996년 3월 5일 서울을 출발하여 다음날 델리에 도착했다. 도착 후 북쪽에 있는 ‘머수리’에 거하게 되었다. 산 중턱의 오두막에 머물게 되었고 집에서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랜도르’ 언어학교가 있었다.

자연환경은 좋았고 날씨는 쾌적했는데 밤에는 추워서 코트를 입고 자야 했다. 이 지역은 히말라야산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북쪽으로 장엄하게 8개의 산이 멀리 층으
로 보였다. 집 주위의 나무 위로는 때론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지붕과 나무 위로 뛰어다녔다.


치료받은 인도 학생의 성경 읽기와 맹인학교에서의 생일 50 주년 기념

필자 부부가 사는 집에 16세의 힌두 가정의 학생 ‘나레쉬’가 질병으로 찾아왔다. 병원에 갔으나 효과가 없다고 찾아와 집에 있는 상비약으로 며칠 간의 약을 주었고 올 때마다 같이 기도했다. 학생은 8일 만에 건강이 회복되었고 감사하다며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필자는 학생에게 ‘힌디’ 성경을 읽어 줄 것을 권유하여 함께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 시험으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왔을 때 쪽 복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96년 4월에는 아내와 함께 ‘데라둔’의 맹인학교에 갔다. 한국과 인도를 오고 갈 때에 유숙한 곳이었는데 신앙이 좋은 원장 ‘사무엘’과 ‘수마나’ 부부가 책임자로 있었다.

필자 부부가 학교의 게스트 하우스에 잠시 머물었을 때 필자의 50세 생일을 위해 케이크를 자르고 자녀들이 정성 어린 카드와 벽장식으로 축하해 주어 우리가 감격했다.


랜도르에서의 힌디 공부와 데라둔 선교병원
‘머수리’의 ‘랜도르’ 언어학교에서 공부가 시작되었고 새로 익히는 ‘힌디’는 ‘우르두어’ 글자와 달랐으나 발음이 같았다. 필자는 15분간 산으로 올라가 네 시간 공부했다.

‘힌디’는 4개월 공부하여 최종 시험에서 70점을 받아 통과되었고 병원 일이 시작되었다. 필자가 사역했던 ‘데라둔’의 ‘ 허버트뿌르’ 병원은 당시 60년 전 영국 의료 선교사가 세운 선교 병원이었다. 뉴델리에 속한 UP 주인 ‘웃떠르 쁘라데쉬’ (Uttar Pradesh)와 북쪽으로 인접한 ‘히마철 쁘라데쉬’ 주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큰 역할을 하는 병원이었다.


허버트뿌르 병원의 상태와 필자의 역할
필자 가족은 언어 공부 후 병원에 도착하여 의사 숙소에 짐을 풀었다. 병원의 의사는 약 150명으로 긴급히 필요한 의사들만 병원 내에 살았다. 필자의 역할은 인도인 의사들에게 전립선의 내시경적 수술과 요관 결석을 결석경을 통해 제거법을 가르치며, 전기 소작기로는 사마귀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병원에서는 한 전문의가 다른 과의 환자들도 수술하기 때문에 필자의 비뇨기과 수술에 관심이 많았다. 필자는 아침 5시에 새벽기도, 8시에 채플 참석 후 8시 30분에 회진하여 오후 5시에 일과가 끝났다.


병원의 환경은 아늑하고 이웃들이 가족들처럼 느껴져 아내가 만족하였다. 우리는 같은 숙소에 사는 현지 의사들과 교제하였고 원장은 ‘샘 토마스’ 외과 의사로 복음에 열심
이었고 필자와 협력이 잘 이루어졌다. 같은 숙소의 의사들도 우리를 초대하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그 중에는 연로한 영국인 마취과 여의사 ‘팻트 웨이컴’이 있었다. 그 선교사는 독신으로 영국을 떠나기 전 선교사로 가야 하는가를 7년간 고민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늘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잘 토닥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새벽 기도를 일으킴
병원에서는 주일 예배가 10시에 있고 새벽 기도는 없었다. 필자는 원목에게 새벽 기도 시작하기를 권면하여 두 가정에서 먼저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는 원장이 공식적으
로 발표하여 몇 가정이 더 늘었고 아침 5시에는 의사 두 가정을 깨우면서 교회로 가곤 했다.


허버트뿌르 병원에서 수술 환자의 전도 결실
어느 날 전립선 비대증으로 소변을 보기 힘들어하는 75세 환자가 내원했다. 필자는 전립선 제거 수술을 할 때 늘 하던 대로 수술 전에 기도드렸다. 환자의 몸이 회복된 후
에는 병실에서 ‘힌디’ 쪽복음으로 성경 말씀을 매일 나누었고 20세가 된 아들이 간호하여 두 사람은 함께 말씀을 들었다. 환자는 귀가 잘 안 들려 침대에 누운 상태로 허리
를 구부리고 경청했다. 환자는 수술 경과가 좋아 곧 퇴원 하게 되었다.

필자는 퇴원 전날 주일 아침에 병원 채플에 나오도록 환자 아들에게 권유했다. 아들에게 예배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하던 일을 마치고 다른 환자의 보호자인 청년에
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다. 그는 우리를 따라 나왔고 우리 세 사람은 채플의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예배 후에 필자는 청년들에게 예배드린 느낌을 물었을때 뒤따라왔던 청년은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두 청년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한나절 가는 ‘히마철 쁘라데쉬’ 주에서 왔는데 그곳에는 교회가 없다고 했다.

필자는 그들에게 힌디 성경을 주면서 집에서 매일 읽도록 권면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간 후에 환자의 아들에게서 감사의 편지가 왔는데 필자는 답장해 주면서 계속 성경 말씀을 읽도록 권면했다.


병실 환자 전도
필자가 병실 환자에게 전하기도 했다. 한 노인이 당뇨병으로 인해 한 쪽 다리를 절단하고 병실에 입원했다. 병실은 추워서 환자는 따뜻한 양지를 찾아서 병원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고 필자는 가끔 그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필자는 그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힌디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면회 온 가족들에게 읽
어 달라고 말하여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요한복음을 크게 읽었다.


그때 마당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우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성경 말씀을 경청했다. 이들이 예수
님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은 인도인들이 다신교들로서 또 다른 신을 소개하는 것 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필자는 전도할 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네팔 소녀의 주님 영접과 선교 비자의 중단
필자는 ‘허버트뿌르’ 병원에서 일할 때 네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인도 북부에는 네팔인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종교는 힌두였다. 필자는 병원 일이 일
찍 끝날 때 때때로 병원에서 거리가 먼 네팔 마을을 방문하곤 했다. 필자는 어느 날 아침에 전도를 위해 현지 사람의 안내를 받아 오토바이를 개조한 릭샤를 타고 네팔 마
을을 방문했다.


안내자는 네팔인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친척이 사는 힌두 집을 방문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차를 대접했다. 우리는 준비해 간 찬송을 불렀
고 필자는 찬송가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자기의 큰딸이 아팠을 때 어떤 목사님의 기도로 치료받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힌두 우상에게 제사했는데 딸이 못 하게 하여 중지했다고 했다.

필자는 주님께서 이 가정을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 딸을 만나고 싶었다. 딸은 오후 4시에 학교에서 돌아온다고 하여 다시 4시에 방문했다. 딸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
이 많았고 성경을 매일 읽는다고 했다. 그러나 딸은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도 멀어서 못 나갔다고 했다.


필자는 예수님과 성경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고 이 때에 온 가족과 이웃들이 와서 같이 들었다. 필자는 그 딸이 아주 진지하게 듣는 모습을 보았고 딸에게 사영리로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 결신문에서 주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딸은 거리가 먼 병원 채플에 계속 나왔다.

그 후에 안내했던 네팔인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기를 부탁했는데 필자는 비자 문제로 인도를 떠나게 되어 소녀와 성경 말씀을 더 나눌 수 없었다. 인도 정부의 새 수상이 강한 힌두 정책을 펴면서 1997년부터 선교 비자를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보사부에 가서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비자의 연장을 부탁했으나 국가 정책으로 할 수 없다고 하여 1996년 12월 인도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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