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늦가을 오월이다. 곧 겨울이 온다. 나는 어디서 와서 지금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삶의 속도와 방향은 제대로 가고 있는가. 일방통행으로 내몰려 떠밀려가지는 않고 있는가.
지금 우물쭈물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에는 신선하고 해맑았는데 이제는 골았거나 썩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출생지와 졸업한 학교는 바꾸지 못해도 국적은 원하면 바꿀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자독식 사회의 부조리를 떠나왔는데, 여전히 이민자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떠나온 사람을 보면 원하는 대로 떠나는 사람과 먹고살기 위해 떠나는 사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운명이라는 빙의를 통해 욕망과 분노를 분출한다. 결국“사람은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 것,// 중략// 아하, 새벽은 멀었나 보다.”라고 김관식 시인은 <병상록>에서 말한다.
운명의 기억은 죽음에서 지문처럼 남는다. 죽음은 대물림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고 자라고 일하다가 죽는다. 남는 것은 죽고 나면 알게 된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라고 댄 브라운은 <디지털 포트리스>에서 적고 있다.
분명하게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늘 불안하다. 자신의 불안과 우울이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늘 혼자 버텨보려다가 그만 절망에 빠지고 만다.
집 밖에서 자기표현에 서툰 탓에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직장에서도 소통이 없다. 유교적인 전통은 그대로 남아 침묵하는 것이 첫 세대에 대한 존중이라고 여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말대꾸하는 것으로 무례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정서적 고립과 세대 간에 갈등이 생겨 서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서로 잘 모른다. 갈등을 피하고자 침묵하거나 고립을 선택했다가 불안과 우울은 혼자라는 고립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고독하게 지낸다.
그러다가 우울감에 조용하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나면 그때 남은 가족은 후회한다.
절대로 아무도 모른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세대 간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교회가 온전하게 감당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가장자리로만 보지 말고 가온누리에 두어 생명을 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