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파키스탄에서 안식년 차 1994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는 사흘간 금식 기도원에서 기도했으며 필자의 연약했던 기관지와 아내의 쇠약함을 치료받았다. 그 후 다음 사역을 위해 발전된 수술법과 최근의 의학적 지식을 배우고자 했다. 다행히 모교 병원인 고대 안암병원에서 교수님들의 배려로 수술 방에서 관찰할 수 있었고 최신판의 내과 책(Cecil)도 기증받았다.
한국에서의 선교 보고와 강의
한국에 머무는 동안 국내의 선교단체가 커지고 많은 이들에게 선교 비전이 주어지는 것을 보았다. 교회들이 선교 방향으로 활성화된 것을 보았고 의대 학생들이 선교사로 나가려는 모임들이 늘어 난 것도 보았다.
필자는 교회와 학교 모임에서 초청하는 곳에 가서 선교 보고나 강의를 했다. 초청하여 간 곳은 고대 CCC 캠퍼스, 안암병원 기독의사 모임, CCC 나사렛 형제들의 여름 수련회, 서울대병원 개강예배, 전주 ’94 선교분과 강의 등에서 선교에 대한 강의와 경험을 나누었다. 그들의 반응은 매우 진지하고 자신들의 전문성 외에 더 넓은 시야를 갖추고자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필자는 선교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영어를 포함한 언어 습득을 강조했다. 또한 서울 기독의사회의 회원이었던 필자는 연례 모임에서 선교 보고를 하며 격려를 받았고 후원해 준 일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표했다. 한국 의료인으로서 해외에 나갔던 선교사로는 강원도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던 강원희 선교사가 방글라데시로 가면서 처음으로 해외 의료선교의 문을 열었고 다음은 이용웅 내과의사, 우리 팀은 세번 째였는데 36년이 지난 지금은 170여개국에서 800명이 넘었다.
한국에서의 봉사와 중국 단기선교 및 진료
무료 진료의 봉사로는 구로동의 갈릴리교회에서 외국인 근로자 200여 명에게 베푸는 일이었다. 외국인 환자들은 질병과 마음이 연약한 상태라 그런지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특히 인도인들에게 힌디어로 전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오후 2시에 드리는 외국인 예배에는 ‘우르두어’로 파키스탄, 인도와 네팔인들과 교제를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 신림동에 영세민을 위하여 선우경식 원장(사촌 형님)이 세운 요셉의원에서 격주로 피부과와 비뇨기과 환자들을 진료했다.
1994년 여름에는 CCC에서 8일간의 중국 단기 진료 팀에 동참했다. 조선족 인구가 반을 차지하는 연길에서 두 곳의 삼자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나누고 300명가량의 환자를 진료했다. 예배를 드릴 때에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하루는 자동차로 도문과 이도백화를 지나 백두산 밑에 이르렀고, 걸어서 천지까지 올라가면서 준비한 쪽 복음을 중국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모두 쪽 복음을 읽으며 천천히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천지의 큰 호수에 이르러 맑은 물에 발을 담글 때 아주 시원했고 천지의 큰 규모(10km2)에 놀랐다.
우리 팀은 연길시 외곽에 있는 연변 과기대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김진경 박사를 뵈면서 중국인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기아차 내부의 방을 볼 수 있었다. 점심은 넓은 식당에서 중국 학생들과 같이 뷔페식으로 먹었는데 김진경 박사는 필자에게 평양에 병원이 지어지면 부르겠다고도 했다.
인도 사역을 위한 구체적 준비와 인터서브와의 동역
파키스탄에서 돌아온 후에 한국 인터서브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와 교제하던 한국 인터서브 대표인 박재형 교수를 통해 인도의 기독병원을 알게 되면서 인도 북부에 위치한 ‘데라둔’의 ‘허버트뿌르’ 기독병원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때 병원 책임자가 필자에게 인도 의사들에게 비뇨기과 수술을 가르치며 히말라야산 근처의 미전도 종족들을 위해 사역해 주도록 요청했다. 필자는 CCC 본부와 의논하였고 새로운 개척을 위해 인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인도행을 결정했고 일(work) 비자를 신청했다.
인도 병원에서 사용할 수술 기계 준비와 고대 기독학생회의 단기선교
필자는 1995년 1월 17일에 인도를 재답사하였다. ‘허버트뿌르’ 병원에서의 업무와 요관 결석경 등 기구들을 점검할 구체적 사역 준비를 위해서였다. 또한 고대 기독학생들과 세 명의 교역자로 구성된 23명의 단기 선교팀에 동참했다. 우리 팀은 ‘뉴델리’에 도착하여 다음날 필자가 사역할 ‘데라둔’의 병원을 방문했고 ‘머수리’의 ‘랜도르’ 언어학교를 돌아보았다.
돌아올 때는 미전도 지역의 전도와 진료를 위해 서쪽의 ‘뭄바이’와 동쪽의 ‘칼카타’에서 110명에게 전도하고 1,103명을 진료하여 20일간의 여정을 마쳤다. 이번 방문을 통해 많은 학생이 인도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행했던 두 목사님은 인도 선교를 결정했다.
총회의 서남아시아 선교대회 참석
2월 13일에는 인도의 ‘뱅갈로르’에서 시행한 서남아시아 선교대회가 있었다. 필자 부부는 목사님들 20명과 함께 참석하면서 필자는 성령과 선교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폐회 후에는 함께 서쪽의 ‘뭄바이’, 동쪽의 ‘칼카타’, 남부의 ‘마드라스’와 ‘뉴델리’를 순회하며 선교 사역지를 돌아보았다.
인터서브의 연수를 위한‘사이프러스’와 터키 방문
인터서브를 통한 사역의 첫 일은 ‘사이프러스’의 ‘니코시아’에서 연수받는 일이어서 1995년 2월에 방문했다. 내용은 인터서브의 역사, 신앙 신조, 선교 정책이었고 마침 첫 선교 사역지로 네팔에 가려던 양승봉 의료선교사 가족이 있어 함께 8일간 연수받았다. 인터서브 본부는 사이프러스 북쪽에 위치하여 비행기가 남쪽 상공을 경유하여 갈 수 없어 영국을 통해 갔는데 이는 남과 북이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이프러스’의 바로 위에 위치한 터키도 방문했다. 같은 CCC 파송 선교사인 조용성 목사님이 ‘이스탄불’에서 사역하고, 남부 항구 도시인 ‘메르신’에서는 인터서브 선교사인 송창섭 선교사가 있었다. ‘이스탄불’에는 겨울에 집집마다 유연탄을 때기 때문에 공기가 오염되어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머리가 무겁고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회교권이라 전도도 어렵지만 생활 환경이 어려운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동쪽인 ‘메르신’은 지중해 연안이라 바람이 잘 불어 매연이 없었으나 ‘메르신’의 동쪽인 ‘이란’에서 ‘쿠르드’족이 내려와 정부군들과 교전이 있다고 했다. ‘메르신’의 동쪽 가까이에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있어서 송 선교사님의 안내로 ‘다소’(Tarsus)와 ‘안디옥’(Antakya) 교회를 방문했고 교회 안에는 ‘카타쿰’이 속으로 계속 이어져 옛날에 어려웠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5월에는 ‘지코’ (GCOWE) ’95 세계 선교대회가 횃불 회관에서 열렸다. 216개국에서 4,600여 명의 국가 대표들이 오고 자원봉사자 700여 명이 돕는 국제 선교대회가 되어 진료를 돕기 위해 참석했다. 외국인들은 멀리서 오는 과정에서 이미 지쳐 있었고 열대지방에서 오는 분들은 추워하고 진행 일정이 바빠서 환자들이 밤까지 끊임없이 찾아왔다. 많은 의료인이 도왔지만 손들이 모자라 필자는 한 곳에도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으나 환자들과 교제를 나누며 유익한 시간도 가졌다. 인도에서는 160여 명의 지도자들이 와서 반갑게 만났고 숙소에 가서 따로 만나기도 했다.
총신 신대원의 MTI 훈련과 총회와 CCC의 인도 파송 식
필자는 졸업한 총신 신대원의 GMS 선교 단체에서 하는 27기 MTI 훈련을 5개월간 받았다. 훈련 과정에서는 훈련생 동료 목사님들과 교제들을 나누면서 의학 강의, ‘힌디’강의와 선교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진료가 필요한 목사님들에게는 기독 의사들이 있는 병원과 의원들을 소개하여 비용을 저렴하게 해줄 기회도 있었다.
후배 의사인 박영순 안과에서는 눈을 무료로 수술해 주었고, 치과의 윤병호 선생님은 아주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다. 저렴하게 최선의 검사를 약속한 곳은 ‘사랑의 클리닉’의 황성주 박사와 서안복음병원 이건오 원장 등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1995년 8월에 MTI를 수료하고, 람원교회의 후원과 총회와 CCC 파송으로 1996년 3월에 인도로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