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We died to sin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로마서 6장 1-2절 말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Romans 6:1-2(New International Version)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By no means! W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직/의역: NIV 성경을 기반으로 재번역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으려고 계속 죄를 지어야 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더 이상 살 수 있지?”


말씀의 나눔 로마서는 ‘죄 – Sin, 심판 – Judgment, 칭의 – Justification, 성화 – Sanctification, 영화 – Glorification, 최후의 승리 – Final Victory’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나열된 주제만으로도 교회에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나 로마서 6-8장은 ‘칭의 – Justification by Faith’이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후의 그리스도인, 곧 성도로서의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고 있으며, 특별히 6장은 ‘성화 – Sanctification’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롬 6:1)”라고 하는 이 말씀은 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특히 이 말씀 가운데 “거하겠느뇨?”라고 하는 말씀은 NIV 영역 성경이 표현하는 것처럼 ‘go on – 꾸준히 지속하다’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한 답이 2절에 있는데 그것은 “그럴 수 없다 – By no means!”는 것이다. 그렇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죄를 더 많이 짓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칭의 – Justification by Faith’ 곧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됨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나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성화 – Sanctification’는 이처럼 ‘단회적인 – once-for-all’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 progressive’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일지라도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큰 범죄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윗도 그렇지 않았는가? 우리는 죄에 빠진 다윗을 보면서 그를 향하여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가 법적으로는 의인이 되었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성이 가득한 연약한 이 육신에 거하기에 죄의 문제는 내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살면서 점진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육신을 입었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죄에 계속해서 머무려는 성도는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온 죄책과 오염은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연약한 이 육신 때문에 나는 죄에 머무를 수밖에 없노라 주장하고 의도적으로 죄 가운데 거하기를 즐겨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주장이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W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롬 6:2).” 그렇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죄에 계속하여 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죄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NIV영역성경은 상당히 직관적이다. ‘We died to sin –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단순 과거형으로 쓰여 있다. 따라서 죽음에 관한 이 사건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기에 죽어있는 사람은 더 이상 반응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리 소리치고 그의 몸을 흔들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렇게 죽은 자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성도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이미 죄와 분리된 상태에 들어갔기에 계속해서 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있을 수도,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 여전히 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Thanks be to God–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I myself in my mind am a slave to God’s law, but in the sinful nature a slave to the law of sin(롬 7:24-25).”

바울 사도는 자신과 같이 이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로마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그들이 죄에 대하여 이제 이렇게 죽은 몸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일상 가운데 죄를 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 성도는 본질상 그 죄책, 바로 그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처럼 죄의 권세가 로마교회의 성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림으로 죄로 인한 사망이 성도의 삶을 주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로마교회의 형제자매들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를 또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죄악되고 타락한 이 육신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비록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존재이기는 하지만 육신의 생각은 늘 하늘에 거할 수 없다는 한계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라 할지라도 때로 실수도 하고 죄도 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죄에 거할 순 없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NIV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We died to sin – 우리는 이미 과거,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후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라!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유혹 속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나는 이미 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란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칭의 – Justification’는 단회적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성화 – Sanctification’ 곧 거룩한 삶이란 일시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 점진적인 과정이 반드시 우리의 삶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로마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뿐 아니라 이 말씀을 읽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여하신 이 거룩함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더 이루어가는 그 점진적 과정을 통하여 복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영어 한마디!

Don’t you have some responsibility for this too? 당신도 이번 일에 책임 있지 않아?

Me? By no means!
나? 결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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