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문학에서의 요한복음 『죄와 벌』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을 묘사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문학 세계에서 성서는 단순한 종교적 배경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창작의 근원을 이루는 신학적 토대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교회의 예배와 전통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특히 시베리아 유형 시절에 유일하게 접할 수 있었던 신약성서는 그의 영성과 세계관을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선과 악, 죄와 고통, 그리고 구원—을 깊이 사유하게 했다. 인간의 육체적 조건보다 영혼의 어둠과 빛을 더 깊이 탐구했고, 인간 본성의 복잡성과 파괴성,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파헤쳤다. 그에게 성서는 윤리적 지침을 넘어 소설 구성의 원형이자 문학적 모델이었다.

여러 성서 텍스트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그의 사유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한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은총·자비·사랑이라는 구속사적 메시지는『죄와 벌』전체를 관통하며 문학적으로 승화된다. 특히 작품의 중심 모티프인 ‘나사로의 부활’(요 11장)은 도스토옙스키가 신앙적으로 가장 깊이 붙들고 있었던 이미지였으며, 라스콜니코프의 영적 회복을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소설 속에 재현된다. 정교회 신앙의 핵심인 ‘부활’은 단지 죽음 이후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절망 속에 죽어 있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삶에서 새 생명을 얻는 사건을 의미한다.

라스콜니코프가 점차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갱생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곧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듯, 인간이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옮겨지는 요한 신학의 에피소드를 반영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특별히 ‘나사로의 부활’ 부분에 주목한 이유는, 그 기적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참되게 부활시키시는 분”이라는 신앙적 확신의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정말로 인간을 새롭게 하고 부활의 생명을 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문학이라는 언어로 탐색한 것이다.

결국『죄와 벌』은 범죄소설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구속 메시지를 문학적 언어로 변용해낸 작품이며, 도스토옙스키가 믿었던 부활 신앙의 절정을 담아낸 영적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죄와 벌』이 드러내는 신학적 진실 – 죄, 인간, 그리고 신이 되고자 한 젊은이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가난한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저지른 살인을 중심으로 인간의 죄와 회복이라는 깊은 주제를 다룬다. 이 작품이 신학에서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왜 가난한 청년이 살인을 저질렀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의 범죄를 단순한 범죄 심리나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하는 시도라는 신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경제적 절망으로 인해 범죄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살인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를 시험해 보려는, 매우 위험한 욕망에서 비롯 되었다.

주인공은 세상을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누고, 비범한 사람에게는 법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은 거대한 목표를 위해서는 타인의 생명쯤은 희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도 그런 존재인지 시험해 보고자 한다. 그는 “나는 인간인가, 아니면 벌레인가”라는 고백의 핵심은 자기 존재의 위대함을 증명해보려는 욕망이다. 즉, 그는 법과 윤리, 심지어 양심마저 뛰어넘어 ‘신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신의 자리에 설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작가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어디까지 하나님을 대체하려 하는가?”


라스콜니코프가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여러 ‘우연의 일치’로 둘러싸여 있다. 어머니의 편지, 잔혹한 꿈,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가 집을 비우는 사실을 알게 된 일, 술집에서 젊은이들이 “노파 한 명의 죽음이 수백 명을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등은 그에게 마치 어떤 신비로운 ‘신호’처럼 다가온다. 그는 마치 자신의 범죄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느낀다. 특히 그의 범죄 동기는 그럴듯한 윤리적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다. 전당포 노파 한 사람을 제거하면 그 돈으로 수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 윤리는 실제로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범한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하려는 거짓된 논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경 속 최초의 죄, 즉 아담과 하와의 죄를 떠올리게 된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단순히 그 열매가 탐스러워서가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창 3:5)라는 뱀의 말이 핵심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의 범죄를 통해 이 오래된 패턴, 즉 인간이 신의 권한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문학 속에서 재현해낸다.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서 있으며, 죄는 외적 요인에 의해 유혹받지만 결국 최종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는 성서적 원리를 작품은 말하고 있다.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은 외부 상황이 만든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따라 스스로 선택한 반역이었다. 범죄 이후 주인공의 반응은 더욱 흥미롭다. 그가 상상한 ‘비범한 인간’의 모습과 실제 자신 사이의 틈은 너무도 컸다. 그는 공포와 메스꺼움, 혐오 속에 빠지고, 자신이 도끼로 내려친 노파의 방 옆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논문에서 “비범한 인간은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자신은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 작가는 그의 붕괴를 통해 ‘죄의 본질’을 드러낸다. 죄는 처음에는 달콤하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인간을 파괴하고 고립시키며 자신을 무너뜨리는 힘을 가진다.

바울의 말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리가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는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죽였다”라고 고백하며 죄의 자기 파괴적 본질을 인정하게 된다.

라스콜니코프와 대조되는 인물은 소냐이다. 그녀는 가난과 슬픔 속에 살아가지만, 스스로 생명을 판단하거나 타인의 운명을 결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녀는 하나님이 인간의 생사와 운명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 “누가 살아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결정할 권리가 내게 있느냐?”는 그녀의 말은,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바른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신앙고백이다. 소냐는 자신도 구원받아야 할 연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주인공을 품고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존재가 된다. 그녀가 라스콜니코프에게 건네는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라, 그의 죄를 직면하고 회개하며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라는 초대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소냐는 교회의 전형, 즉 상처 입은 인간을 품고 회복의 길로 인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정죄하지 않고, 그의 죄의 무게를 함께 지고 가겠다고 말한다. “우리 함께 고통을 짊어지고,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이 말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속죄와 동행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라스콜니코프의 범죄는 그가 신이 되고자 했던 시도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몰락은 그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라스콜니코프의 육체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에게는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기독교 신학은 죄를 철저히 규정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문을 닫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절망의 깊은 골짜기에서조차 인간은 다시 걸을 수 있는 길을 제시받는다. 그리고 그 길의 출발은 언제나 죄의 인정과 고백이다.

『죄와 벌』은 단순한 범죄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디까지 하나님을 대체하려 하는가를 보여주는 신학적 성찰이며, 죄의 본질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영적 탐구이다. 라스콜니코프의 무너짐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 할 때 어떤 파멸이 찾아오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소냐의 사랑과 십자가의 상징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회복의 길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신이 되고자 하는가, 아니면 신 앞에서 인간으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도스토옙스키는 분명히 말한다. “구원은 신이 되는 순간이 아니라, 인간임을 인정하는 순간 시작된다.”

『요한복음』과 만나는 지점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에 이르게 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그가 스스로 세운 인신(人神) 사상, 즉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위험한 사상에서 비롯된다. 그는 인간의 도덕과 법을 초월해도 되는 ‘비범인’을 상정하며, 그 경지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자기기만임이 작품 속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주인공의 인신 사상은『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대비된다.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신인(神人)으로, 오직 그분만이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는 권세를 가진 분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스스로 도달하고자 했던 ‘신적 존재’는 인간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설수 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죄와 벌』의 메시지는 결국 두 축으로 수렴된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갱생 그리고 공동체 정신을 통한 치유와 회복이다. 라스콜니코프가 단독으로는 결코 회복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회복은 소냐라는 ‘사랑의 매개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했다. 이는 인간이 홀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집필 목적(요 20:30-31)에서 밝혔듯이 전적으로 구원을 향한 복음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새 생명의 선언이다. 그리고『죄와 벌』에서의 회개·갱생의 방향성과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구원·부활의 메시지는 같은 지점을 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요한복음의 신학을 문학적 형식으로 다시 써낸 셈이다. 라스콜니코프의 실패와 절망, 그리고 소생의 길은 곧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적 부활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독자에게 건네는 결론은 분명하다.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될 수 없으며, 참된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이 명하신 사랑의 실천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요한복음』의 복음이자, 도스토옙스키가『죄와 벌』을 통해 증언하고자 한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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