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
어느 새 올 해 마지막 글을 적고 있다. 선교에 대한 글의 마감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니 떠오른 단어가 부르심 Calling이다. 결국 선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람이 응답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진행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갈 길을 알지 못했으나 집과 고향을 등지고 나섰다(히 11:8). 귀족 이사야도,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도 부르심에 응하여 선지자가 되었다(사 6: 8, 암 7:14) 어부 베드로도, 세리 마태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하던 일들을 뒤로 하고 새로운 길로 나섰다(마 4:19, 마 9:9). 이들은 왜 부르심에 응했을까? 자신이 해왔던 일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일까? 부르신 분의 요청이 강렬했던 것일까?
성경은 성도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히3:1). 여기에 답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주 특별하다.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일은 경이로운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도, 신약의 사도도 모두 자신을 향한 부르심의 가치를 알았다. 그랬기에 단호히 해 오던 일을 뒤로 하고 그 부르심에 응했다.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특정 부류가 아닌 성도 전부를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다. 모든 성도가 어둠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아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사람들로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9)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
부르심의 목적
거룩에로의 부르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룩을 위한 부르심이다. 성경에서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는 코데쉬인데 기본적으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하여 특별히 구별된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행실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야 한다고 교훈 한다. 사도 바울 또한 범사에 선한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명한다. 그의 바램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하는 것이었다(살전 5:21-24).
선한 일에로의 부르심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나님께서 우주 보다 더 높은 가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 성도를 구속하심은 이 가치에 걸맞은 선한 일에 특화된 그의 친 백성을 만들고자 하심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구원받은 이들이 힘써야 할 일을 선한 일로 표현한다(엡 2:10, 갈 6:9, 딤후 3:17 등).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한 행실이 하늘의 아버지에게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신다(마 5:16). 야고보서는 성경적인 경건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가운데서 돌보는 것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약 1:27). 즉 선한 일에 힘쓰면서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경건이다.
사명에로의 부르심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소명은 사명으로 간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메세지와 메시지와 대상이 주어졌고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복음과 대상이 주어졌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훈련시킨 후 사명을 주어 모든 민족과 천하만민에게 그리고 땅 끝으로 보내셨다(마 28:19, 막 16:15, 행 1:8).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전권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리시고 세상의 마지막까지 모든 사명자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갖고 보내심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부르심과 충성
소명에 따른 충성은 필수적이다(고전4:2). 문제는 충성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소명자가 모든 방해물들을 극복하고 충성되려면 몇 가지 기억해야 할 내용들이 있다.
부르신 자가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디모데에게 군인을 예로 들어 충성을 가르치면서 군인으로 부름을 받은 자는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자신을 소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딤후 2:4). 인간 사회 가운데 온갖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충성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시다(골3:23-24). 소명자는 주를 섬기고 주께 상을 받는다. 필자의 절친은 한국에서 긴 세월 노숙자들을 섬겼다. 그의 사역 현장을 여러 번 방문했던 나는 그 사역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안다. 그가 한번은 주위를 둘러보다 슬럼프에 빠졌다. 그와 함께 신학을 했던 이들 중(흔히 말하는) 대형 혹은 중형 교회를 담임하면서 명성을 얻는 이들과 잠시 자신을 비교하게 된 것이다. 곧 슬럼프에 빠져나오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하늘의 소명을 받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께 충성하는 것이다’였다.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부르신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의 성품과 태도를 반영하지 못하는 소명자는 일의 성취 여부를 떠나 복음의 영광을 반감시킬 수 있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으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의 용서, 평안으로 하나됨을 제시했다(엡 4:1-3). 이 항목들은 모두 예수님의 성품이며 소명자가 주를 본 삼는 일이 온전할수록 그의 충성도 빛이 날 것이다(마 11:29, 빌 2:5-10).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사역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필자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세상의 빛이라고 명명하셨기에 특히 이 빛 무리들을 섬기고 이끄는 사역자들은 거기에 알맞은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온 교회 모든 성도가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해야 하겠지만 교회를 인도하고 섬기는 이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마 5:14, 행 20:28).
충성은 부르신 이와의 동행이다
선교가 낯선 곳을 개척하는 힘든 사역이지만 외롭지 않은 것은 임마누엘의 약속이 따라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신약의 모든 사도가 평생 누렸던 복은 동행하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일 것이다. 인디언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에는 그가 사역보다는 주님과의 교제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살았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 중국 내지 선교에 개척자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그의 초기 사역에 애를 먹었고 많이 실망하였을 때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교훈에서 생수를 마시듯 영적으로 해갈하며 선교의 전환기를 마련했다. 선교는 소명자를 통해서 소명을 주신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기에 무엇보다 그분과의 동행하는 일상이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깨달은 것이다(요 15:5, 마 28:20).
맺음말
필자의 지난 모든 이야기는 이 땅의 교회가 선교체질을 가져야 하는데 기도로 함께 하고 현장을 밟아야 하며 특히 미전도종족을 향해 나가도록 도전한 것이었다. 오늘은 이 지고한 가치의 사역을 위해 부르신 분에게 어떤 태도로 답해야 하는 지 생각을 나누었다.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 유일하신 하나님, 범죄한 적이 없는 천사들도 얼굴과 발을 가리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소리 높여 찬송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해 부르셨기에 모든 소명을 받은 이들은 자신의 전부로 이 부르심에 반응해야 한다(창 14:22, 시 89:11, 대상 29:11, 사 6:2-3). 소명은 충성을 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