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CT 촬영을 하러 검사실로 들어갔을 때까지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50년이 가까워져 오지만 아내는 항시 건강했고 그 흔한 감기마저 걸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한참 뒤 검사실에서 나온 의사가 결과를 묻는 나에게 “폐암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의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뭐라고 하셨지요?” “폐암이라고 했습니다. 입원하셔서 좀 더 다른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꽤 진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말을 마친 뒤 의사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에 나를 지나 걸어 나갔고 그와 같이 있던 간호사 한 분이 내게 다가와 입원 절차를 도와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폐암이라니, 이 사람이 폐암이라니!’ 아내의 입원을 위해 간호사가 건네준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내 머릿속으로 그 옛날 우리 가정을 휘몰아쳤던 죽음의 기억이 끈적거리는 더위처럼 온몸을 감쌌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사람들이 와서 병실로 안내해 드릴 거예요,”라고 말하며 간호사가 서류를 갖고 자리를 떴지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때 우리 가정에 다가온 죽음은 처음엔 내 막내 여동생을 쳤고, 이어서 아버지를 쳤고 급기야는 어머니까지 쳐서 넘어뜨렸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공격한 죽음의 정체는 폐암이었다. 그렇기에 의사로부터 아내가 폐암이란 말을 듣자 거의 사십 년 전 그 옛날 우리 가정을 몰아쳤던 죽음의 회오리가 반사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1984년 9월 어느 날이었다. 결혼한 뒤 신랑과 더불어 공부한다고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흐라는 도시에 가 있던 막내 여동생이 죽었다고 매제로부터 전화가 왔다. 매제 말에 의하면 동생이 저녁 식사 후 이층 아파트 베란다에 혼자 나갔는데 무슨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동생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뛰어 내려갔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 동생은 그때 임신 중이었고 만삭이었다.
아직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그때 마침 복수여권을 갖고 있던 형님이 급히 현장으로 날아가서 매제와 더불어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한 뒤에 한 줌의 가루를 상자에 넣어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동생의 유해 가루를 산에 뿌리면서 딸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안에 죽음이 시작되었다.
슬픔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우리 가족 모두는 빨리 해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해가 바뀌면 악몽에서 벗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12월 30일 이틀만 지나면 새해가 오는 그 저녁 밤이 제법 깊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고 그 전화 너머에는 다급한 목소리의 어머니가 계셨다.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으니 빨리 오라고 하셨다. 집에서 천호동의 원호병원까지가 왜 그렇게도 멀었는지 자동차의 악셀을 밟아도 밟아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급히 응급실로 뛰어들었지만 아버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다.
넋이 나가신 듯 종잇장처럼 하얀 모습으로 앉아 계시던 어머님이 손짓으로 안에 들어 가보라고 해서 영안실에서 이미 차가워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저녁을 잡숫고 산책하러 나가셨던 아버지를 뒤에서부터 트럭이 들이받았다는 것이 사고를 접수한 경찰의 말이었다.
마음 놓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우리 형제들은 장례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1월 1일 새해 첫날, 남들은 부모님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그날에 우리들은 급히 구한 가평의 공원 묘원의 차가운 땅에 아버지를 묻은 뒤 마지막 절을 하고 눈물을 뿌리며 돌아섰다. ‘이 추운 곳에 저 양반을 혼자 놓아두고 어떻게 내려가느냐고, 못 내려가겠다고’ 몸부림치시는 어머니를 떠메다시피 하고 우리들은 산을 내려왔다.
그 뒤 우리 집에선 웃음소리가 사라졌지만 비극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해 8월에 어머니가 기침을 좀 하시기에 아내가 의사 친구에게 모시고 갔더니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가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 폐암인 것 같다며 영동 세브란스의 흉곽 전문의 이 모 박사에게 이미 소개장을 써놓았으니 시각을 다투어 모시고 가서 검사를 하라고 했다.
검사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이미 암세포가 가슴 전체에 퍼져서 수술할 수가 없고 방사선 치료가 유일한 방법이지만 부작용이 무척 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으십니까?”라는 내 질문에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의 감정을 배제한 대답은 무슨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 하나님,” 그 순간 나는 어느덧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 “동생을 데려갔고 또 아버님을 데려가셨으면 됐지, 이제 어머니까지 데려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고 끝도 없는 공포와 슬픔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항암 치료를 받으셨지만 어머님은 결국 6개월 뒤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6개월 동안 우리는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에 나갔고 그 6개월은 어머니에게도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마음을 다해 찬송하며 어머니도 우리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다.
돌아가시는 날 어머님 병상에는 마침 형 내외와 우리 부부가 있었다.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예감하신 듯 어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말씀하신 뒤 병상에 반듯이 누우셨다. 가슴의 고통으로 그때까지 병상에 제대로 눕지도 못하시던 어머니가 반듯이 눕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모두 긴장하여 어머니를 둘러싸고 섰다.
잠깐 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방긋방긋 웃으셨다. 마치 누군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 웃는 모습이었다. 우리 모두가 놀라는 다음 순간 어머니는 두 손을 번쩍 들어 할레루야를 세 번 외치시더니 곧이어 두 다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계단을 오르듯, 아니면 누구를 향해 달려가시듯. 그리고 잠시 뒤, 허공으로부터 두 다리가 침상으로 내려오고 어머니는 고요히 숨을 거두셨다.
‘할렐루야!’ 누가 먼저인지 몰라도 이번엔 우리가 소리쳤다. 그때 우리는 깨달았던 것이었다. 천국 문에서 기다리는 예수님을 보셨기에 어머님은 웃으셨고 할렐루야를 외쳤고 다리를 높이 들며 예수님께 달려가신 것이셨다.
돌아가시면서 천국문이 열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친히 보여주신 어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 뿐이 아니라 친척 친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어머님의 은혜로운 죽음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 가족 모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이제껏 살아왔다.
‘그런데, 왜지요?’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회상에서 깨어나 허공을 우러러보았다. ‘하나님, 왜,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나는 계속해서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십 년 전 우리의 시련은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깊은 뜻으로 받아드리고 이제껏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왜지요? 그리고 왜 하필 아내입니까? 신실한 믿음의 여인인 아내는 지금도 만나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힘을 다해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고 또 하필 그 고통스러운 폐암입니까? 차라리 저를 벌하십시오. 아내는 놓아주십시오.’
나는 어느새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 부르짖다 지쳐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도 잘 안 나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는 말만 입술을 달싹이며 끝없이 계속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다.
‘대답 좀 해주세요, 하나님, 답답합니다. 대답 좀 해주세요!’ 나도 모르게 기도가 이렇게 바뀌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답이 없으셨고 나는 지쳐서 기도를 멈추려고 했다. 그 순간 어렴풋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압니다, 하나님. 하지만, 때로는 너무도 높은 당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번 시련을 통해선 무엇을 알려주려 하십니까? 그래도 이번에도 당신을 믿고 이 시련을 극복하며 당신의 뜻을 알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발 이번만은 아내를 선한 생명의 도구로 사용하셔 이 땅에서의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도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지금부터 아내와 힘을 합해 병마와 싸워 나가야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같이 기도해주시기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