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9월 둘째 주 찬송/9월 넷째 주 찬송

9월 둘째 주 찬송/230장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c. 1225-1274)는 이탈리아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사제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켜 근대 사상의 기초가 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로카세카 성의 란돌프 백작 아들로 태어나 다섯 살에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받고, 열다섯 살에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여 탁발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다.

그는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스콜라 철학자이며, 자연과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를 만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스콜라 철학자가 되었고(스콜라 철학은 11세기 이후 비잔틴에서 보존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 소개되면서 성립), 그의 추천으로 파리 대학 신학 교수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의가 철학과 신학의 주류였던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보완하려고 시도했다. 신앙과 인간의 이성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해 주는 것이라 믿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 플라톤 철학의 연구를 체계화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주해서’와 ‘진리에 대한 토론 명제집’, ‘이교도 대전’ 등 수많은 저서를 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철학과 신학 학교인 스콜라주의의 정점을 대표하며, 신앙과 이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과 성경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탁발수도회 배격 운동에 대처하기 위해 다시 파리 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기원으로 하는 교부 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신 플라톤 철학, 이슬람, 유대 사상 등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아퀴나스적 총체’로 불리는 독창적 사상체계를 확립하여 서방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토마스학파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퀴나스의 찬송 시는 우리 찬송가에 230장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Adoro Te devote, latens Deitas”)가 실려 있다. 이 찬송은 전례를 위한 찬송 시는 아니고, 개인 기도용입니다. 곡명 ADORO TE DEVOTE도 동시대인 13세기 찬트 멜로디이다.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다 함께 모여서 경배하세
나 주님 앞에 죄인이오니
정성을 다하여 찬송합니다”(230장, 1절)

프랑크(César Franck) 작곡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의 찬송 시는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 “거룩한 잔치들”(“Sacris solémniis”) 중 마지막 두 절이다. ‘생명의 양식’의 원제(‘Panis Angelicus’)는 라틴어로 ‘천사의 빵’이라는 뜻이다. 프랑크는 1872년에 오르간, 하프, 첼로와 더블베이스, 합창 반주의 테너 독창곡으로 작곡했다. 프랑크 외에도 샤르팡티에, 생상스의 작품이 있다.


“천사의 양식은 우리의 양식이 되고
천사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네
오묘한 신비여. 가난한 주님의 종
주님을 모시는 커다란 이 감격”(‘생명의 양식’ 1절 번역)

9월 넷째 주 찬송/166장(통156장) 싸움은 모두 끝나고

교황 전속 작곡가 팔레스트리나의 영광송
찬송 ‘싸움은 모두 끝나고’의 곡명 VICTORY(The strife is o’er)는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가 작곡했다(성은 피에를루이지, 보통 출신 지명인 팔레스트리나라고 부름).

그는 이탈리아 로마 근처 팔레스트리나에서 나폴리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교황령의 일부였다. 어려서 로마 교구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성가대원이 되어 교육받았다. 15세에 로마에서 위그노파인 구디멜(Claude Goudimel)의 학교를 다녔다. 19세에 고향에 돌아와 성 아가피토 대성당(Cathedral of St Agapito)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

26세에 팔레스트리나 주교였던 교황 율리우스 3세는 교황 성가대 디렉터로 임명했다. 그러나 후임인 교황 바오로 4세는 교황 성가대 대원은 반드시 성직자여야 한다는 명을 내려 일찍 가정을 이룬 평신도였던 팔레스트리나는 교황청 성가대를 나와 성 요한 라테라노 성당과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등 다른 교회 성가대 디렉터로 섬겼다.

46세에 바티칸 대성당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045편의 미사곡, 68편의 봉헌송, 140편의 마드리갈, 300여 편의 모테트, 72편의 찬송가, 35편의 마니피캇, 11편의 연도, 여러 편의 애가 등 수백 편의 작품을 남기며 교황 전속 작곡가 칭호를 받으며 세싱 떠나는 날까지 대음악가로 존경받았다.

팔레스트리나는 르네상스 작곡가로서 로마악파의 가장 잘 알려진 16세기 대표 작곡가이다. 그는 특히 대위법의 발전에 있어서 유럽의 교회와 세속 음악의 발전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곡명 VICTORY는 몽크(William Henry Monk, 1823-1889)가 1861년에 ‘알렐루야 후렴구’를 편곡하고 라틴어 찬송 시(‘Finita iam sunt proelia’)를 영역한 포트(Francis Pott)의 찬송 시에 붙여 ‘고금 찬송가’(Hymns Ancient and Modern)에 실었다.

세뇨 부분은 팔레스트리나의 1591년 작곡한 ‘제3 선법 마니피캇’(Magnificat Tertii Toni) 중 마지막 송영(Gloria Patri)에서 따왔다. ‘마니피캇’이란 라틴어로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마리아의 송가’(눅 1:46-55)를 말한다.

이 글은 필자가 진행하는 유튜브‘김명엽의 찬송교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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